Gershwin Rhapsody in Blue
Leonard Bernstein (piano, Conductor)
Columbia Symphonic Orchestra 1959,06,23 Stereo St. George Hotel, Brooklyn, New York |
우디 앨런이 1979년에 만든 <맨해튼>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앨런은 감독뿐 아니라 영화 속의 주인공 아이작 데이비스 역으로 직접 출연까지 하지요. 직업은 방송 코미디 작가인데 낭만적이고 수다스러우면서도 어딘지 소심한 캐릭터입니다. 거대하고 휘황한 도시에서 뭔가 애정 결핍 같은 것을 지니고 살아가는, 뿔테안경을 쓴 약간 위선적인 지식인으로 비치기도 합니다. 영화는 바로 그 남자, 아이작 데이비스의 독백으로 막을 열지요.
먼저 카메라가 뉴욕의 거대한 빌딩 숲과 사람들의 일상적 풍경을 하나하나 더듬습니다. 마천루의 야경과 뒷골목의 주차장, 건설 현장과 노동자들, 시위하는 군중, 학교 수업이 끝나고 왁자하게 몰려나오는 아이들, 거리를 지나가는 예쁜 여자들, 연애를 즐기는 청춘 남녀들, 브로드웨이의 명멸하는 입간판, ‘즐겨요. 코카콜라!’ 광고판, 롱샷으로 잡은 뉴욕 양키즈의 스타디움 같은 것들이 화면 위로 바쁘게 흘러가면서 데이비스가 자신이 쓰고 있는 드라마 대본을 약간 시니컬한 목소리로 읽어나갑니다. “제1장, 그는 뉴욕을 사랑한다”는 대사로 시작하는데, 뉴욕에 대해 이런저런 묘사를 늘어놓다가 “이건 아닌데” 하면서 여러 차례 말 바꾸기를 시도합니다. 뉴욕의 매력을 줄줄 늘어놓는가 싶다가도 “마약, 쓰레기, TV, 시끄러운 음악, 범죄!” 같은 단어들이 튀어나오기도 하지요. 그렇게 묘한 뉘앙스의 대사로 뉴욕을 툭툭 건드리면서 시작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도입부 장면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 곡의 음악이 쉬지 않고 연주됩니다. 영화 속의 데이비스는 뉴욕에 대해 이렇게 독백하기도 하지요. “조지 거슈윈의 음악이 고동치는 도시.”
그렇습니다. <맨해튼>의 도입부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Rhapsody in Blue) 입니다. 이번 글은 이렇게 영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앨런이 자신의 영화 속에서도 표현했듯이 조지 거슈윈(1898~1937)은 ‘뉴욕의 음악가’입니다.
비슷한 시기의 미국 음악가로는 아론 코플랜드(1900~1990)가 있는데, 그는 대도시 뉴욕보다는 ‘서부의 음악가’로 불리는 것이 더 적절할 겁니다. 두 사람은 모두 뉴욕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20세기 초반의 미국을 대표하는 음악가로 손꼽히지만, 음악적으로는 매우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거슈윈은 뉴욕의 대중음악, 특히 재즈에서 출발해 그것을 자신의 음악적 특성으로 끝까지 유지했습니다. 음악적 수업 과정은 거의 독학이었습니다. 거슈윈이 그렇게 자신의 재즈적 스타일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마흔 살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더 오래 살았더라면 또 어떤 음악적 변모를 보여줬을지 짐작하기 쉽지 않습니다.
◀ 거슈윈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미국 음악가 아론 코플랜드반면에 코플랜드는 20대 시절에 잠시 재즈적 스타일을 구사하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보다 클래시컬한 음악 쪽으로 시선을 향하면서 거슈윈과는 또 다른 맛의 ‘미국 음악’을 만들어냈습니다. 음악을 공부한 과정도 거슈윈의 ‘거의 독학’과 달리, 코플랜드는 파리로 유학해 전설적인 음악 교사인 나디아 블랑제에게 사사했습니다. 대표작들인 <엘 살롱 멕시코> <빌리 더 키드> <로데오> <애팔래치아의 봄> 등에서도 보이듯이, 20세기 초중반의 미국적 자연주의를 음악으로 구사했던 작곡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매우 광활한 분위기의 음악을 썼지요.
이번 글의 주인공은 물론 거슈윈입니다. 약간의 망설임이 있기는 했지만, 클래식 음악의 보편적인 걸작들, 다시 말해 오늘날 많은 이들이 즐기고 있는 음악을 중심으로 선곡해나가는 <더 클래식>에서 미국의 20세기를 대표하는 음악가 거슈윈을 빼놓을 수 없겠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예컨대 그가 작곡한 ‘서머 타임’이라는 곡을 모르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겁니다. 흑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재즈 오페라 <포기와 베스>에서 약간 왁자한 분위기의 서곡이 끝나고 곧바로 등장하는 유명한 곡이지요. <포기와 베스>가 ‘오페라’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극 중의 대사를 레치타티보(recitativo, 오페라, 종교극 등에서 대사를 말하듯이 노래하는 형식)로 처리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만약 음악을 입히지 않고 ‘그냥 대사’로만 처리했다면 <포기와 베스>는 음악극이거나 뮤지컬로 불리는 것이 더 타당하겠지요. 실제로 거슈윈은 1920년대에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뮤지컬 작곡가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1934년에 아리아와 레치타티보로 이뤄진 <포기와 베스>를 작곡하면서 마침내 ‘오페라 작곡’이라는 영역으로까지 성큼 들어섰지요. 아울러 자신의 오랜 꿈이었던 ‘흑인 오페라’라는 숙원을 달성하기도 했습니다. 이 오페라의 등장인물들은 ‘백인 형사’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흑인들입니다.
물론 거슈윈은 흑인이 아닙니다. 코가 유난히 커다란, 머리카락을 뒤로 완전히 빗어 넘긴 그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어딘지 약간 흑인의 분위기를 풍기기도하지만, 사실 그는 러시아에서 온 유대계 이민자의 아들이었지요. 그의 아버지 모리스 게르쇼비츠는 1890년대에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사랑하던 애인 로자 브루스킨(거슈윈의 어머니)이 가족과 먼저 미국으로 이주하자 그 뒤를 따라 자신도 배를 탔다고 합니다. 물론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겠지요. 사실 그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 무렵은 러시아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미국으로 건너갔던 시기였습니다. 정치적 격변기의 러시아에서 먹고 살기 쉽지 않았던 유대인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너도, 나도 미국행 증기선에 몸을 실었던 것이지요. 혹시 오래전의 영화 <지붕 위의 바이올린>(1974년)을 기억하는지요? 애상적인 선율의 주제곡 ‘선라이즈 선세트’로 유명한 이 영화가 바로 당시의 러시아에서 일어났던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지역의 유대인 마을을 배경으로, 미국 땅에서 만날 것을 기약하면서 뿔뿔이 흩어지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는 영화였지요. 거슈윈도 그렇게 미국 땅에 들어선 부모의 네 아이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그중에서도 첫째 아이라(Ira)는, 훗날 거슈윈이 작곡한 수많은 노래의 가사를 썼던 작사가였습니다.
집안에 들여놓았던 피아노도 원래는 첫째 아들 아이라를 위한 것이었지요. 하지만 형의 피아노가 오히려 동생 조지의 운명을 결정짓습니다. 이때부터 거슈윈은 흑인들의 랙 타임(Ragtime)을 연주하면서 점점 음악에 빠져듭니다. 물론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이 그 밖의 대중음악에도 재미를 느꼈겠지요. 또 거슈윈은 10대 중반에 잠시 클래식 수업을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당시에 유행했던 피아노곡은 역시 랙 타임이었고 거슈윈이 가장 흥미를 느꼈던 것도 바로 그 음악이었습니다. 그에게 재즈는 그렇게 다가왔습니다. 이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틴 팬 앨리’(브로드웨이 근처의 음악출판사 밀집지역)의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직업 음악가’로서 첫발을 내딛습니다. 처음에 한 일은 고객들을 위해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출판사에 악보를 사러 온 손님한테 직접 그 곡을 연주해 들려주곤 했는데, 거슈윈이 바로 그 일을 했던 것이지요. 이런 선전 연주자들을 ‘송 플러거’(song plugger)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거슈윈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직장 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작곡에도 손을 대기 시작합니다.
감히 단언하자면 그는 천재였습니다. 특히 ‘선율의 귀재’였지요. 다시 말해 거슈윈의 음악은 학습과 이론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저절로 몸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장점이자 동시에 한계로 작용하기도 했지요. 어느덧 브로드웨이의 유명 작곡가로 성장한 거슈윈이 오늘날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는 <랩소디 인 블루>를 초연한 것은 1924년이었습니다. ‘킹 오브 재즈’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폴 화이트먼(1890~1967), 대규모 재즈 밴드를 이끌고 ‘심포닉 재즈’라는 장르로 인기를 얻었던 그가 거슈윈에게 재즈와 클래식을 아우르는 협주곡을 써달라고 청탁하면서 이 곡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것이지요.
물론 거슈윈으로서는 처음 해보는 작업이었습니다. 훗날 그는 <랩소디 인 블루>의 악상이 뉴욕에서 보스턴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떠올랐다고 술회한 적이 있습니다만, 본격적인 ‘심포닉 재즈’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선율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았을 겁니다. 결국 차일피일 미루다가 연주회가 임박해서야 악보를 내놨는데, 그마저도 관현악 부분이 미숙해서 화이트먼의 편곡자였던 퍼디 그로페(1892~1972, <그랜드 캐년 모음곡>의 작곡가)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랩소디’란 형식이 자유로운 기악곡을 뜻하지요. 예전에는 ‘광시곡’으로 많이 번역했는데, 요즘에는 그냥 ‘랩소디’로 부르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랩소디 인 블루>에서 ‘블루’는 ‘우울하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재즈의 ‘블루 노트’를 뜻하는 것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3음, 5음, 7음을 반음 내리는 재즈의 독특한 음계를 ‘블루 노트’라고 하는데, <랩소디 인 블루>에서는 바로 이 음계가 빈번히 사용됩니다.
음악의 반향은 상당히 컸지요. 1924년 2월 12일, 화이트먼 밴드와 거슈윈의 피아노 연주로 이뤄진 초연은 성공적이었습니다. 또 몇 해 뒤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초청받아 연주되기도 했습니다. 이때 거슈윈은 파리를 방문해 많은 에피소드를 남겨놓기도 했는데, 그중에서도 유명한 것이 라벨과의 만남이었지요. 당시 거슈윈이 라벨에게 한 수 가르침을 청하자, 라벨은 “당신은 이미 일류 거슈윈인데, 왜 이류 라벨이 되려고 하느냐?”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라벨마저도 거슈윈을 인정했다는 측면을 강조하는, 유명한 일화인 셈입니다.
한데 이런 성공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랩소디 인 블루>가 미국 음악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점이겠지요. 거슈윈은 39년의 짧은 생애 동안 수십 편의 뮤지컬과 수백 곡의 대중가요를 썼지만, 오늘날 그를 ‘미국의 20세기 작곡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된 최초의 음악이 바로 <랩소디 인 블루>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이 곡은 거슈윈에게도 작곡가로서의 자의식을 한껏 고양시킨 계기였습니다. 자신의 약점을 스스로 알고 있던 그는 <랩소디 인 블루> 이후, 보다 진지한 음악을 향한 노력을 엄청나게 쏟아붓지요. 그는 이미 브로드웨이의 작곡가로 명성이 자자했음에도 불구하고 관현악법과 화성학 공부에 꼬박 매달립니다. 그 결과가 1925년 12월 3일 카네기홀에서 자신이 직접 피아노를 맡아 초연했던 <피아노 협주곡 F장조>였습니다. 뉴욕 필하모닉의 위촉으로 작곡된 이 곡을 듣다 보면 거슈윈이 1년 남짓한 기간에 얼마나 열심히 음악을 공부했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3악장으로 이뤄진 이 곡은 1악장의 소나타 알레그로 형식, 느린 2악장의 3부 형식, 이어서 빠른 3악장의 론도 형식을 엄격하게 지키면서 거슈윈 특유의 재즈적 선율을 그 틀 속에서 구사하고 있지요. 이미 충분히 배부르고 등 따스한 ‘흥행 작곡가’가 이렇게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 그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곡들은 <랩소디 인 블루>와 <피아노 협주곡 F장조>, 그리고 1928년 역시 카네기홀에서 초연된 관현악곡 <파리의 아메리칸> 등입니다. 뒤로 갈수록 음악의 완성도가 점점 높아지는 것이야말로 ‘거슈윈의 힘’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와 관련해 미국의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이 남긴 언급들이 흥미롭습니다. 그는 국내에도 번역돼 나와 있는 <음악의 즐거움>(느낌이 있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지요.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거슈윈은 대중음악을 쓰다가 클래식을 작곡한 사람입니다. <랩소디 인 블루>는 별개의 이야기를 쑤셔 넣은 다음, 밀가루 반죽으로 얼기설기 이어붙인 곡이죠. 하지만 차이코프스키 이래 거슈윈만큼 아름다운 선율을 쓴 사람은 달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선율에 있어서만큼은 슈베르트와도 어깨를 나란히 하지요. 거슈윈은 작곡을 거듭할수록 나아졌어요. 내가 거슈윈의 작품을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 진실함에 있지 않나 싶어요. 훌륭해지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오직 선한 의도만을 가진 작품이니까요.”
<랩소디 인 블루>는 듣기에 편안한 곡입니다. 템포의 변화에 따라 크게 3부로 나눠볼 수가 있겠지요. ‘몰토 모데라토’로 지시된 1부는 적절한 중간 템포로 흘러가는데, 특히 도입부에서 클라리넷이 유머러스한 글리산도(음에서 음으로 미끄러지듯이 연주하는 것)를 선보이는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이어서 약간 느린 템포로 흘러가는 2부(안단테 모데라토)에서는 피아노가 우울한 랩소디에 분위기를 살려내고 있지요. 감미롭고 애상적입니다. 그러다가 3부로 들어서면 ‘알레그로 아지타토 미스테리오소’로 템포가 빨라지면서 음악이 급격히 고조됩니다. 그렇게 뜨겁고 열정적인 장면이 펼쳐지다가 피아노와 관현악이 한 덩어리가 되어 클라이막스를 이루면서 마침표를 찍습니다.
1. 레너드 번스타인, 콜럼비아 심포니 오케스트라 | 1959년 | Sony Classiccal
국내 매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음반이다. 번스타인이 지휘뿐 아니라 피아노 연주까지 직접 맡았다. 녹음 당시 번스타인의 나이는 41세. 한창 젊은 시절의 번스타인이 경쾌한 감각으로 음악을 풀어나간다. 그는 LA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도 같은 곡을 녹음(1982년)해 남겼지만, 젊은 시절의 연주가 더 참신하고 흥이 난다. <랩소디 인 블루>와 <파리의 어메리칸>(An American in Paris)이 함께 수록돼 있다. |
2. 얼 와일드, 어서 피들러,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 | 1959년 | RCA 번스타인과 콜럼비아 심포니의 연주와 쌍벽을 이루는, 아니 어찌 보자면 더 인기와 명성을 누려온 음반이다. 2010년 95세로 타계한 얼 와일드(Earl Wild)는 '영원한 청년'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피아니스트였다. 심장수술을 받은 노인의 몸으로 90세 생일 기념 연주투어를 가졌고, 말년에도 새로운 곡에 도전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개성 있는 쇼팽 연주뿐 아니라 바그너와 슈트라우스, 라흐마니노프와 죠시 거슈윈의 음악을 자기만의 스타일로 편곡해 연주하기를 즐겼다. 그렇게 활력 넘치는 피아니스트였던 그가 40대 중반에 선보인 이 녹음은 한마디로 호기와 여유가 넘치는 연주를 들려준다. 변화무쌍하면서도 매끄러운 케포의 처리가 일품이다. 오케스트라 사운드도 좋다. <피아노 협주곡 F장조>, <파리의 아메리칸>, <아이 갓 리듬' 변주곡>을 함께 수록했다. |
3. 스테파노 블라니, 리카르도 샤이,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 2010년 | Decca 비교적 근래의 녹음 중에서 추천한다. 재즈와 클래식의 접점에 자리한 이 음악을 '재즈 피아니스트'의 연주로 들을 수 있는 특별한 음반이다. 스테파노 블라니는 한국의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에도 다녀갔고, LG아트센터에서도 연주했던 이탈리아 출신의 피아니스트다. <랩소디 인 블루>와 <피아노 협주곡 F장조>를 수록했다. 고색창연한 독일 악단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는 점도 이채롭다. 이탈리아 태생의 지휘자 리카르도 샤이의 '유쾌한 선택'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앞서 소개한 음반들보다 재즈적 흥취가 한층 생생하다. 라이브로 녹음돼 더욱 그렇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