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져 있다시피, 모차르트의 주력 악기는 피아노(좀 더 정확히는 현대 피아노의 전신인 포르테피아노)였다. 모차르트는 피아노라는 악기가 한창 발전하며 음악무대의 전면으로 부상하고 있던 시기에 이 악기의 특장점을 가장 잘 활용한 작곡가 겸 연주가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남긴 피아노 소나타들은 음악사에서 하이든이나 베토벤의 작품들만큼 중요하게 거론되지는 않는다. 아마도 그것은 그의 피아노 소나타 작곡이 다분히 ‘실용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모차르트는 대략 열아홉 곡의 피아노 소나타를 남겼는데, 그 중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곡으로는 마지막 악장의 ‘터키 행진곡’으로 유명한 11번 A장조 K.331, 소나티네 앨범에도 실려 있는 ‘쉬운 소나타’ 15번 C장조 K.545, 그리고 이례적으로 격정적인 파토스를 내재한 8번 A단조 K.310 등이 있다. 이 가운데 1778년 여름 파리에서 작곡된 ‘A단조 소나타’는 흔히 모차르트의 최고 걸작 피아노 소나타로 꼽히는 작품이다.
1777년 가을에 고향 잘츠부르크를 떠난 이후, 모차르트의 ‘구직 여행’은 독일의 만하임을 거쳐 프랑스의 파리로 이어졌다. 사실 모차르트는 사랑하는 알로이지아가 있는 만하임을 떠나기 싫었지만, 주된 목적인 구직 활동에서 별다른 소득 없이 고향으로부터 날아드는 아버지의 성화를 견뎌내기란 불가능한 노릇이었다. 더구나 그의 아버지 레오폴트는 그와 알로이지아의 관계를 심히 못마땅해했다. 레오폴트는 수차례 편지를 보내서 그에게 파리로 갈 것을 종용했고, 결국 그는 1778년 3월 중순에 만하임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평생 그렇게 지루한 적이 없었던’ 9일여에 걸친 마차 여행 끝에 모차르트와 그의 어머니는 3월 23일 파리에 도착했다.
그로부터 6개월간 이어진 파리 체류기는 모차르트의 생애에서 가장 불행했던 시기로 기억된다. 처음에는 피아노를 갖다 놓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누추한 숙소에서 힘겨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얼마 후 집안의 오랜 친구인 그림 남작의 도움을 받으면서 사정이 나아졌고, 만하임에서 사귄 친구들과 해후하는 등 한동안 희망적인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생계를 위해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그는 ‘신께서 주신 재능을 허비하는 것’으로 여겼고, 콩세르 스피리튀엘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플루트, 오보에, 바순, 호른을 위한 신포니아 콘체르탄테 E플랫장조’의 공연은 연주용 악보의 미비로 무산되었다. 모차르트는 파리의 음악가들이 자신을 질투하고 경계한다고 의심했다.
사실 모차르트는 파리가 싫었다. 일시적인 유행만을 뒤쫓는 변덕스러운 청중들이 혐오스러웠고, 자신을 멸시하는 공작부인의 저택에서 그림 그리기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을 두고 형편없는 피아노를 연주해야 했을 때는 모욕감과 분노심마저 일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사랑하는 알로이지아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래서였는지 그는 난생 처음 아버지에게 노골적으로 반항하기도 했다. 베르사유 궁전의 오르간 연주자로 오라는 제의를 거절했던 것이다. 6월 18일에 콩세르 스피리튀엘에서 연주된 교향곡 31번 D장조 K.297 ‘파리’가 청중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이끌어내면서 잠시 짜릿한 기쁨을 맛보기도 했지만 파리에서의 그의 운은 거기까지였다.
어머니를 위한 소나타
모짜르트의 어머니 안나 마리아는 1720년 12월 25일에 잘쯔부르크의 이웃 마을 성 볼프강 호반의 성 길겐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성장 과정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4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잘쯔부르크에 와서 사는 동안 1747년에 레오폴트와 결혼했다.
이 부부 사이에는 7명의 자식이 태어났으나 처음 5명은 모두 1년 미만에 죽었고, 마리아 안나 (나네를)과 볼프강만이 자라 많은 희망과 기쁨을 안겨 주었다. 레오폴트는 꼼꼼하고 적극적인데 비하여 그녀는 특색이 없는 정숙한 여성이었다. 모짜르트의 환상과 낙천적인 유머는 어머니의 유전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의 어머니는 병을 앓고 있었다. 장기간의 불안정한 여행 동안 나빠진 건강이 아들이 밖으로만 나도는 사이에 느낀 소외감 때문에 악화되었던 것이다. 결국 그녀는 며칠 동안 사경을 헤맨 끝에 7월 3일 저세상으로 떠나고 말았다.
모차르트는 그 참담한 소식을 담은 장황한 편지에 실어 고향으로 띄웠다. 비록 그 편지에서 그는 애써 의연한 척, 아버지와 누이를 더 걱정하는 척하고 있지만, 다음 대목에서는 자신의 심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이제 그에게 남은 일은 아버지의 원망과 불평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것, 그리고 파리보다 더 싫은 잘츠부르크를 향하여 귀향길에 오르는 것이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기 싫어서 어떻게든 파리에 붙어 있으려고 몸부림쳤지만, 아버지의 힐난과 회유는 끊이지 않았다. 그는 깊은 침체에 빠졌고, 재정난에 시계를 잡히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