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이 되면 가을을 꽃처럼 아름답게 수놓았던 나뭇잎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유례가 없을 정도로 극심한 가뭄임에도 불구하고 찬 비가 내린다. 그와 함께 기온은 내려가고 햇살은 창백해진다. 이에 사람들은 옷을 하나 더 입고 단추를 하나 더 잠근다. 그리고 외로움을 느낀다. 무엇인가 비어 있다는 느낌. 그 허함은 깊은 우수로 사람들을 이끈다.
이 공허함, 외로움은 실제 혼자인 외로움일 수도 있지만 그 전에 존재 자체의 외로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를 제대로 이해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에 허함을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그 누가 옆에 있다고 해도 쉽게 해소될 수 없다. 사실 내 전부를 이해해 줄 사람을 찾는 것은 허황에 가까운 바람이 아닐까? 단언컨대 나는 세상에 나를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어느 한 사람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음 속에 존재하지도 않는 실연의 슬픔 같은 것을 안고 살아간다. 그것이 나뭇잎이 지는 늦가을이 되면 마음의 심연에서 서서히 부상하는 것이다. 그렇게 계절 탓, 특히 떨어지는 기온 탓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고독이 밀려올 때면 나는 음악을 듣는다. 감히 말하건대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음반들은 내 외로움의 숫자이다. 외로울 때마다 나는 더욱 더 음악에 집중했다. 특히 슬픈 음악을 들었다. 자료 출처 : Bugs
01. I'm A Fool To Want You / Billie Holiday
나는 슬픈 음악 하면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의 후기 노래를 제일 먼저 생각한다. 특히 생전의 마지막 앨범으로 남아있는 [Lady In Satin]은 슬픔을 너머 고통을 느끼게 한다. 빌리 홀리데이의 괴로운 삶이 노래에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무대 위에서는 크나큰 인기를 얻었지만 무대 밖에서는 다른 흑인들과 마찬가지로 인종차별을 받았다. 심지어 자신이 출연하는 클럽의 정문으로 출입하지 못했으며 함께 한 백인 연주자들과 같은 호텔에 머물 수도 없었다. 그 전 어린 시절에는 성폭행의 피해자였음에도 보호 받기는커녕 감옥에 가야 했다. 그녀가 사랑한 남자들은 모두 그녀를 이용하기만 했다. 이런 힘든 삶은 술과 마약의 세계로 그녀를 인도 했다. 또한 청춘 시절 고왔던 목소리를 거칠고 갈라지게 만들었다. 앨범 [Lady In Satin]은 그 고난한 삶을 그대로 담고 있다. 앨범에서 그녀는 아픈 사랑의 노래를 집중적으로 노래했다. 그 가운데 국내에서도 적지 않은 인기를 얻고 있는 ‘I’m A Fool To Want You’는 그 고통스러운 삶을 그대로 느끼게 해준다. 사랑만 제대로 받았다면 내 삶은 이렇게 흘러가지 않았을 것이라 말하는 듯 그녀는 슬픔과 회한을 가득 넣어 노래한다. 그래서 나는 이 곡을 자주 듣지는 않는다. 들으면 마음이 푹 가라앉기 때문이다. 게다가 분위기 좋은 카페 같은 곳에서 들으면 마음이 불편하다. 그녀의 불행을 즐기는 듯한 죄책감마저 느낀다. 그런데 그 불편함 속에서도 어떤 위로의 느낌을 받기도 한다. 빌리 홀리데이가 “힘들어도 버텨봐, 나 같은 사람도 있었잖아. 네 삶은 나보다는 낫잖아”하고 말하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02. Don't Explain / Nina Simone
니나 시몬(Nina Simone)의 노래도 이어서 들어보자. 니나 시몬은 재즈 듣는 남자 7번째 시간에서도 소개했지만 정치적인 성향의 곡들을 종종 불렀다. 그 안에는 여성으로서 겪는 삶의 어려움을 위로하는 노래도 포함되는데 ’Don’t Explain’도 그 경우에 해당된다.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로도 유명한 이 곡을 니나 시몬은 슬픔을 안으로 꾹꾹 눌러 담는 듯한 분위기로 노래한다. 내 마음을 몰라주는 사랑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끼지만 그 마저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여인의 모습이랄까?
03. The Thrill Is Gone / Chet Baker
그런데 실제로 이 무렵 이별이 많이 일어나는 모양이다. 얼마 전 우연히 본 남녀간의 이별이 월별로 얼마나 일어나는지에 관해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흥미롭게도 11월 중순부터 서서히 증가해 12월 초순에 이별이 제일 많이 일어난다는 결과가 나왔다. 찬 바람 때문일까? 오히려 두 손을 꼭 잡고 서로를 따듯하게 해주어야 할 시기에 고개를 서로 반대로 돌려 지구상에서 가장 먼 사이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서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에서 시작한 사랑이 실은 불가능할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사랑하는 아니, 사랑했던 사람과 이별한 날에는 쳇 베이커(Chet Baker)의 [Sings] 앨범에 수록된 ‘The Thrill Is Gone’을 들어보자. 청춘의 기운을 가득 담은 쳇 베이커의 노래는 그 불안정한 떨림 때문인지 실연의 정서가 강하다. 사랑하는 여인의 이별 제안을 의지와 달리 받아들인 심약한 남자의 모습을 그리게 한다. 그리 해놓고서 그는 혼자인 상황에서 삶을 비관한다. ‘The Thrill Is Gone’이 그렇다. 이별과 함께 전율이 사라졌다는 쳇 베이커의 노래에서 남겨진 자의 고독이 강하게 느껴진다.
04. Almost Blue / Chet Baker
‘Almost Blue’도 마찬가지다. 우울함, 고독이 연주에서 그대로 느껴진다. ‘Thrill Is Gone’이 그의 청춘 시절에 녹음되었다면 이 곡은 그의 말년에 녹음되었다. 마약으로 인해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흔들리는 삶을 살 때였다. 그래서 안과 밖으로 더욱 외로웠던 시기였다. 그것이 연주에 투영되었기 때문인지 이 곡의 고독은 깊다. 특히 그의 트럼펫 솔로 후에 힘없이 흐르는 보컬을 들을 때면 내 고독을 뒤로 하고 그를 보듬어주고 싶다는 생각마저 든다.
05. You're My Thrill / Joni Mitchell
한편 ‘The Thrill Is Gone’을 듣기 전에 ‘You’re My Thrill’을 먼저 듣는 것도 괜찮다. 제목 때문인지 전율을 주었던 사랑이 끝난 이후의 허망함을 더 잘 느낄 수 있다. 여러 버전 가운데 조니 미첼(Joni Mitchell)의 앨범 [Both Side Now]에 실린 노래를 좋아한다. 조니 미첼은 기본적으로 포크 쪽의 보컬이었지만 찰스 밍거스와 함께 하는 등 재즈도 멋지게 노래할 줄 알았다. 그녀의 ‘You’re My Thrill’은 마냥 밝지 않다.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짝사랑 같은 느낌을 준다. 그렇게 이루지 못한 사랑이 떠나면 더 허망하지 않을까?
06. If Loving You Is Wrong / Cassandra Wilson
허망한 사랑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어서 카산드라 윌슨(Cassandra Wilson)의 [Glamoured]앨범에 수록된 ‘If Loving You Is Wrong (I Don’t Wanna Be Right)’을 들어보자. 카산드라 윌슨의 노래 또한 빌리 홀리데이의 계보에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건조하디 건조하다. 그리고 갈망의 정서가 강하다. 실제 그녀는 올 해 빌리 홀리데이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헌정 앨범을 선보이기도 했다. ‘If Loving You Is Wrong (I Don’t Wanna BeRight)’는 소울 보컬 루터 잉그램(Luther Ingram)의 인기 곡을 다시 부른 것이다. 그대를사랑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나는 똑 바로 살고 싶지 않다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가사는 불륜을 담고 있다. 베이스와 타악기 그리고 기타가 어우러진 단순, 담백한 편성으로 바꾸긴 했지만 카산드라 윌슨의노래는 원곡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 내재된 담담함이 불륜의 사랑이 지닌 쾌락만큼큰 비극적 아픔을 느끼게 한다. 혹시 당신이 이 곡과 비슷한 사랑을 하고 있다면 부디 빨리 벗어나기바란다. 자신을 다 태워야 끝낼 수 있는 것이 사랑이겠지만 이런 사랑은 너무 아프다. 글쎄. 잘못된 것이라도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이 혼자인 것보다 덜외로운 것일까?
07. I'll Be Around ( LP Version ) / Jimmy Scott
지미 스콧(Jimmy Scott)의 앨범 [All The Way]에 수록된 ‘I’ll Be Around’는 누군가를 짝사랑함으로써 더 외로운 사람들이 들으면 많은 위로가 될 것 같다. 담담하고 건조한 지미 스콧의 목소리는 그 자체로 고통스럽지만 그것이 빌리 할리데이만큼이나 위안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지미 스콧을 여성 보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지 모르겠다. 지미 스콧은 이름이 말해주듯 남성이다. 하지만 조금은 특별한 남성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칼만 증후군에 걸렸는데 이 증후군의 증상은 성장이 멈추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평생 작은 키로 살았다. 그래서 리틀(Little) 지미 스콧이라 불리곤 했다. 목소리 또한 성장을 멈추었다. 아니, 어른의 단계를 거치지 못하고 늙어버렸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아닌 할머니 같은 목소리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남성성과 여성성이 공존하는 아니, 중성적인 이 목소리로 그는 인상적인 발라드 곡들을 많이 불렀다. 그리고 그 노래들은 모두 쓸쓸하고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는 힘이 있었다. ‘I’ll Be Around’는 그대가 어떻게 생각하건 나는 그대 곁을 맴돌며 나를 알아줄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내용의 가사가 짝사랑의 아픔을 생각하게 한다. (물론 상대방이 섬짓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08. Exit Music (For A Film) / Brad Mehldau
마음이 우울하고 외로울 때는 일부러 이 감정을 외면하려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더 우울해하고 외로워 하면 마음의 어두움이 가신다. 그래서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더운 여름 날 이열치열(以熱治熱)의 방법을 사용하듯 외롭고 슬픈 정서의 음악이 좋다. 브래드 멜다우(Brad Mehldau)의 피아노 연주가 그렇다. 치열하고 빠른 연주도 즐기긴 하지만 그는 느린 발라드를 연주할 때가 제일 매력적이다. 게다가 그 발라드에 담긴 낭만은 달콤함 보다 우울함이 더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가을의 감상(感傷)에 공감하고 위로한다. 라디오헤드(Radiohead)의 곡을 연주한 ‘Exit Music’이 대표적이다. [Songs: The Art Of The Trio 3]에서 이 곡을 연주하면서 브래드 멜다우는 라디오헤드의 원곡에 담긴 허무와 허망을 그대로 반영했다. 집에 홀로 세상과 단절한 상태에서 갈수록 아래도 내려가는 우울을 느끼게 한다. 고독을 더욱 고독하게 만들고 내 아픔을 알아주지 못하는 세상에 슬퍼하게 한다. 비극적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말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아픈 연주를 듣고 나면 마음 속 외로움이 개운해 지는 것 같다. 브래드 멜다우가 내 외로움을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대학시절 누군가를 좋아한 적이 있다. 좀 오랫동안 좋아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고백을 하지 못했다. 차가운 거절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거절 후 어색해져 아예 만나지도 못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안다. 궁색한 변명이란 것을. 하지만 사실이 그랬다. 아무튼 그리움과 외로움이 밀려올 때 마일즈 데이비스의 앨범 [Seven Steps To Heaven]에 수록된 ‘I Fall In Love Too Easily’를 듣곤 했다.
09. I Fall In Love Too Easily / Miles Davis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게 하는 연주로 종종 로맨틱 발라드 모음 같은 앨범이 수록되고 있는 이 곡은 사실 사랑에 연약한 남자(나는 이상하게도 이 곡이 남자를 위한 곡이라 생각한다)를 그리고 있다. 실연을 당해도 또 누군가를 (혼자) 좋아하고 사랑하게 되는 마음 약한 남자. 마일즈 데이비스의 연주도 이런 정서를 수용한다. 하지만 그의 연주에는 단지 쉽게 빠진 사랑에 괴로워도 그것을 견뎌내는 힘이 느껴진다. 마일즈 데이비스의 부드럽지만 제왕적인 아우라가 반영된 결과이다. 그래서 이 연주를 들으며 나는 마음의 위로를 얻곤 했다. 고독을 즐길 줄 아는 여유까지 생긴다고 할까?
10. Lament / 나윤선
나윤선의 앨범 [Lento]에 수록된 ‘Lament’은 마일즈 데이비스의 적극적 고독의 심화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이 곡은 기분적으로 슬프다. 그런데 나윤선의 노래는 그 슬픔을 안으로 숨기지 않는다. 목에 힘을 주고 슬픔을 고조시켜 결국엔 폭발한다. 그것이 참았던 눈물일 수도 있다. 어쨌건 듣고 나면 가라앉았던 마음에 다시 상승할 힘이 생기는 것 같다.
11. It's Easy To Remember / John Coltrane Quartet
외로움이 커지면 우리는 지난 시절의 누군가를 추억하거나 나타나지 않은 누군가)나를 완벽히 이해해줄 것 같은)를 그리워한다. 사실 다 주질 없는 생각이긴 하다. 되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한 미련이자 불가능한 가능성에 대한 상상일 뿐이다. 하지만 현실적이지 않은 이 생각이 주는 위안의 힘은 대단하다. 외로움을 다시 마음의 심연 깊은 곳으로 넣어둘 수 있게 도와준다.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의 [Ballads] 앨범은 그럴 때 좋다. 늘 진보적이었고 뜨거웠던 이 색소폰 연주자는 발라드 연주에서만큼은 한 없이 부드럽고 낭만적이었다. 그 진수를 [Ballads]에서 느낄 수 있는데 특히 ‘It’s Easy To Remember’는 사랑 후에 남는 아쉬움에 대한 좋은 위안을 준다. 혼자 간 바(Bar)에서 우연히 옆에 앉은 사람에게 무심히 이야기하는 듯한 연주가 사랑의 추억은 “기억하기는 쉽지만 잊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12. She / Harold Mabern
해롤드 메이번(Harold Mabern)의 피아노 솔로 앨범 [Misty]에 담긴 ‘She’도 지난 사랑에 대한 회상 혹은 막연한 새 만남에 대한 기대를 자극한다. 평소 이 피아노 연주자는 매우 묵직하고 역동적인 연주를 즐겼다. 이 발라드 연주에서도 그 기운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평소 무뚝뚝하던 사람의 작은 손길 하나가 더한 감동을 주듯 무심한 듯 하면서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말야...” 하고 이야기를 나지막이 건네는 듯한 연주가 마음을 따듯하게 해준다.
13. I Will Say Goodbye / Barney Wilen Quartet
아픔은 사라지고 좋은 기억만 남아 있는 사랑의 추억을 통해, 그리고 슬프고 우울한 음악을 통해 외로움을 다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면 바니 윌른(Barney Wilen)의 ‘I Will Say Good Bye’를 들어보자. 이 색소폰 연주자는 프랑스 출신에 어울리는 낭만적인 연주를 종종 펼쳤다. 그 가운데 [New York Romance]에 수록된 이 곡은 쓸쓸하고 외로운 분위기이면서도 달콤함을 느끼게 한다. 고독마저 달콤한 초콜릿 같은 연주라 할까?
14. Here's To Life / Cæcilie Nørby
그렇다. 외로움이 단지 누군가 곁에 없어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 내재된 것이라면 우리는 이를 받아 들여야 한다. 그래서 매년 가을이면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는 그것을 나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삶을 풍부하게 해주는 것으로 즐겨야 한다. 이 음악처럼 말이다. 그래서 마지막 곡으로 여성 보컬 세실리에 노비의 [First Conversation]에 실린 ‘Here’s To Life’를 추천한다. 이 곡은 ‘My Way’처럼 삶을 되돌아보고 그에 대한 깨달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이 덴마크 출신의 여성 보컬은 무조건 그 동안 난 열심히 잘 살았다. 그래서 성공했다는 식으로 노래하지 않는다. 조금은 쓸쓸함, 회한을 담아 노래한다. 그래서 외로울 때 들으면 그 감정이 삶의 일부분임을 생각하게 해준다. 자료출처 : Bug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