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가면/ 박인환 詩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술집「銀星」에서 외상값 때문에 作詩했다는~ 세월이 가면

이 詩가 노래로 만들어지게 된 배경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9·28 수복 후, 피란 갔던 문인들이 서울로 돌아왔을 때 朴寅煥 등 문인들은 명동에 둥지를 틀었다. 폐허가 된 명동에도 하나 둘 술집이 들어서고, 식당이 들어서서 사람 사는 냄새가 풍기게 되었다. 당시 탤런트 崔佛岩(최불암)의 모친은 「銀星(은성)」이란 술집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박인환 등이 밀린 외상값을 갚지않은 채 계속 술을 주문하자 술값부터 먼저 갚으라고 요구했다. 이때 박인환이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펜을 들고 종이에다 황급히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은성」주인의 슬픈 과거에 관한 시적 표현이었다.

작품이 완성되자 朴寅煥은 즉시 옆에 있던 작곡가 李眞燮(이진섭)에게 작곡을 부탁하였고, 가까운 곳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가수 玄仁(현인)을 불러다 노래를 부르게 했으며 모든 것이 바로 그 술집 안에서 한순간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 노래를 듣던「은성」주인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밀린 외상값은 안 갚아도 좋으니 제발 그 노래만은 부르지 말아 달라고 도리어 애원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 일화는「명동백작」으로 불리던 소설가 李鳳九(이봉구)의 단편「명동」에 나오는 이야기다.

모더니즘의 깃발을 높이 들고 전후 폐허의 공간을 술과 낭만으로 누비던 박인환!
박인환의「세월이 가면」은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연인을 잃고, 살아 있는 사람과 이별했던, 우리들의 아픈 가슴을 다시 한 번 울게 만들었던 화제작이었다.

을지로 입구 외환은행 본점 건물을 왼쪽으로 끼고 명동 성당쪽으로 비스듬히 뻗어 간 명동길을 걷다 보면 세월의 이끼가 낡고 앙상하게 묻어나는 3층 건물이 나타난다. 이 건물의 2층에는 놀랍게도 딜레탕트 박인환의 흔적을 기억이라도 하듯 "세월이 가면"이라는 간판을 내건 카페가 들어서 있다. 바로 이곳이 전후 명동에서 문인들의 사랑방 노릇을 하던「명동싸롱」이었다.

박인환은 이곳에서 문우들과 어울리다가 계단을 내려와 죽음이 휩쓸고 간 세월의 쓸쓸함을 술로 달래기 위해 맞은편 대폿집 「銀星(은성)으로 향했다. 동석했던 가수이자 배우인 나애심에게 노래를 청하자 끝내 빼는 바람에 역시 같은 자리에 있었던 박인환의 친구 이진섭이 제안을 했다. 인환이 니가 시를 쓰면 내가 곡을 붙이겠다고. 그리고 시가 나오자 이진섭은 즉석에서 샹송풍의 곡을 붙여 흥얼겨렸다. 이렇게「세월이 가면」은 명동의 허름한 대폿집에서 누구나의 가슴 속에 있지만 미처 명확한 단어로 표현 하지 못한 "그 눈동자와 입술" 이란 시어을 발굴해냈다.

한편 이 시에 대하여 강계순은 평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 박인환, 문학예술사, 1983. pp. 168-171) 1956년 이른 봄 저녁.
명동 술집에 모여 앉은 박인환, 이진섭, 송지영, 영화배우 나애심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이 몇 차례 돌자, 나애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졸랐지만 그녀는 좀체 부르지 않았다. 그 때 갑자기 박인환이 즉석에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 시를 넘겨다 보고 있던 이진섭도 그 즉석에서 작곡을 하고 나애심은 흥얼 흥얼 콧노래로 그 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깨어진 유리창과 목로주점과도 같은 초라한 술집에서 즉흥적으로 탄생한 것이 오늘 까지 너무나도 유명하게 불려 지고 있는 「세월이 가면」이다. 한 두 시간 후 나애심과 송지영은 돌아가고 임만섭, 이봉구 등이 합석을 했다. 테너 임만섭이 그 우렁찬 성량과 미성으로 이 노래를 정식으로 다듬어서 불러, 길 가는 행인들이 모두 이 술집 문 앞으로 모여드는 기상 천외의 리사이틀이 열렸다.

마른 명태를 앞에다 놓고 대포잔을 기울이면서 아름다운 시를 쓰고 작곡을 하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지켜 보며 박수를 보내는 많은 행인들, 그것은 마치 낭만적인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은 순식간에 명동에 퍼졌다. 그들은 이 노래를 명동 엘리지라고 불렀고 마치 명동의 골목마다 스며 있는 외로움과 회상을 상징하는 듯 이곳 저곳에서 이 노래는 불리어졌다.

詩,「세월이 가면」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애절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이 詩를 쓰기 전날 박인환은 십년이 넘도록 방치해 두었던 그의 첫사랑의 애인이 묻혀 있는 망우리 묘지에 다녀왔다. 그는 인생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랑도, 시도, 생활도, 차근 차근 정리하면서 그의 가슴에 남아 있는 먼 애인의 눈동자와 입술이 나뭇잎에 덮여서 흙이 된 그의 사랑을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순결한 꿈으로 부풀었던 청년기에 그의 아름다운 사랑이 영원히 가슴에 남아 있는 것, 어떤 고통에도 퇴색하지 않고 있던 젊은 날의 추억은 그가 막 세상을 하직하려고 했을 때 다시 한번 그 아름다운 빛깔로 그의 가슴을 채웠으리라. 그는 이 시를 쓰고 일주일 만에 31세로 생을 마감하였고 지금, 구리시 망우산 공동묘지 사색의 공원에 잠들어 있다.

박인환(朴寅煥: 1926~ 1956)

1940년에 <거리>,
1947년에 <군상(群像)>을 발표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5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1949) 간행을 전후하여 모더니즘의 기수로 각광을 받았다.

<후반기> 동인, 한국 동란의 황페를 의식하면서도 도시적인 서정시를 썼다. 시집으로 작품 56편이 수록된 <박인환 선시집>(1953)이 있다.

1950년대 한국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시인으로 "세월이 가면", "목마와 숙녀" 등 불후의 명작을 남긴 선생의 위대한 문학적 혼을 기리기 위해 내린천과 인북천이 합류하여 합강(合江)이 흐른다고 하여 이름이 붙여진 인제 8경 중 하나인 합강정 정자 아래 선생의 시비가 세워져 "세월이 가면" 시가 음각되어 있으며,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상동리 산촌민속박물관 터에 박인환 시인의 문학관이 설립되었고 주변 일대가 박인환 거리로 꾸며져 지역문화 예술명소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보인다 시와 함께 보헤미안처럼 고뇌하고 방황하며 살다간 박인환 시인의 짧은 생을 애도하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글 출처 : 올리브나무 그늘아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