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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ethoven


Symphony No.1
in C Major Op.21

Symphony No.3
in Eb Major Op.21 'Eroica'


Leonard Bernstein(Conductor)
New York Philharmon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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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DUCTION

Leonard Bernstein(Conductor)
New York Philharmonic

Symphony No.1 in C major Op.21

베토벤은 자신의 교향곡에서 18세기 후반의 전통과 자신의 새로운 어법을 혼합시켰다.
그가 개척한 새로운 교향곡 언어는 19세기 널리 퍼져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제1번 교향곡을 쓰기 전의 30세 나이에 이르는 동안 그는 많은 소나타들과 실내악곡, 그리고 두 개의 피아노협주곡을 작곡하여 이미 거대한 음악형식과 친숙해 있었다. 이러한 그의 음악세계에는 모차르트의 음향구축어법과 하이든의 주제-모티브 작업이 깊이 스며들어 있다.

그러나 그가 새로운 음악세계를 구축하는 데에는 이러한 기법적 전수 못지 않게 프랑스 혁명으로 촉발된 그의 자유시민적인 세계관이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것은 당시에 유행하던 계몽운동과 "질풍노도"라는 철학·문학운동과 연결된 것이었다.

즉, 그는 당시의 사회·정신사적 성숙을 적극 수용한 -그것이 직접적 목적이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음악세계를 가꾼 작곡가로 평가 받는다. 그가 이후 교향곡들에서(특히 제3번 이후) 본격적으로 선보이는 이러한 개성은 제1번 교향곡을 쓸 때부터 이미 내부에 싹트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곡의 새로운 점은 곡의 시작과 함께 나타난다. 딸림7화음을 통한 종지형성의 경향을 보이는 것이 그것이다.
아무 준비 없이 그냥 역동적인 화음을 연결시키면서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이와 비슷한 시작을 베토벤은 후에 <프로메테우스 서곡>의 시작에서도 보여준다.

제1번 교향곡의 이러한 긴장감은 곡이 전개됨에 따라 이후 작곡기법적으로 다듬어지지만 전체적으로 그 여운을 남긴다. 제1번 교향곡에는 아직 그의 대부분의 다른 교향곡들이 보여주는 파격적인 화음연결이나 형식구성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시작부분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역동적이고 내면적인 음향의 처방이 이미 싹트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제3번 <영웅> 교향곡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이 곡은 베토벤이 빈으로 오면서 착상된 재료를 바탕으로 작곡된 것으로 보인다. 1799년에 본격적으로 작곡이 시작되었지만 소재나 스케치는 훨씬 이전, 예를 들면 1796년쯤에 나온 것도 사용하고 있다.

이 교향곡을 전후로 하여 작품18의 여섯 곡의 현악4중주곡과 피아노 협주곡 제3번이 작곡된다. 베토벤으로서는 이 교향곡을 중심으로 하여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와 같은 선배 작곡가의 영향에서 벗어나 진정 자신의 개성을 나타낼 수 있는 방향으로 나가려고 의욕을 불사르고 있었다.

더구나 공식적으로 그 첫 교향곡이며,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 때까지의 자신에 대한 빈의 평가에 한 단계 무게를 더 싣고자 분투한다. 예를 들면 앞서 언급한 대로 제1악장 시작 부분의 화음 처리 방식이나 제4악장 서주에서의 주제를 찾아내는 방법 외에도 제2악장의 소나타 형식에 의한 엄숙한 서정성, 제3악장에서 스케르초의 특성을 보여주는 미뉴에트 등도 이미 선배 작곡가들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제가 모차르트의 것과 비슷하며, 특히 제2주제 제시 방법이 선배 작곡가들과 비숫하고, 악기 편성도 하이든, 모짜르트와 가깝다는 점에서 선배들의 영향을 완전히 넘어섰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악기 편성이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와 비슷해도 관악기 취급 방법과 같은 측면에서는 선배들에게 없는 신선함을 지닌다.

클라리넷과 플루트를 2대씩 사용하는 것도 선배 작품들보다 확대된 편성이다. 더구나 클라리넷은 드물 게 사용되는 C조 클라리넷으로 편성한다. 트롬본은 아직 사용되고 있지 않다. 트롬본은 교향곡에서는 제5번의 제4악장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Symphony No.3 (Eroica) in Eb Major Op.55

Symphony No.3 in Eb Major Op.55(영웅) 인간의 해방을 부르짖던 베토벤의 일면을 찾아볼 수 있는 곡이다. 1789년 일어난 프랑스의 혁명에서는 코르시카 섬 출신의 일개 포병 사관이었던 나폴레옹이 반란을 평정하고 국내 최고 사령관 이 되었다. 민중의 권리를 옹호하고 자유의 정신에 불타 있던 베토벤은 프랑스 혁명을 흥미 있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당시 빈에 주재하고 있던 프랑스 대사와 대사관의 비서이자 바이 올리니스트였던 루돌프 크로이쩌로부터 프랑스에 자유와 질서를 가져온 나폴레옹의 업적에 대해 자세히 들을 기회가 있었다. 플라톤의 '공화국'을 숙독한 바 있었던 베토벤은 이 시대의 영웅의 자태를 보여준 나폴레옹을 자신의 작품으로 찬미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33세 때인 1803년 여름 이 교향곡의 작곡에 착수하여 1804년 봄에 완성시켰다. 스코어의 표지에는 '보나파르트'라고 썼으며 밑에 자신의 이름 '루비트비히 반 베토벤'이라 적어 이를 프랑스 대사관을 통해 파리로 보 내려고 할 무렵,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이 빈에 퍼졌다.

이 소식에 분개한 베토벤은 그 사본의 표지를 찢어 버렸다고 한다.
"저 사나이도 역시 속된 사람이었어. 그 역시 자기의 야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민중의 권리를 짓 밟고 누구보다도 심한 폭군이 될 것이야."
라고 외치면서 말이다.

이후 다시는 나폴레옹에 대해 언급도 안 했다는 그는 2년 뒤 이 곡을 출 판하면서 '한 사람의 영웅을 회상하기 위해 작곡했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17년 후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죽었다는 보도를 듣고 비로소 '나는 그의 결말에 어울리는 적절한 곡을 써 두었다' 라고 했다는 베토벤. 이는 이 작품의 제2악장에 있는 '장송 행진곡'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글 출처 : 필유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