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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호 천상의 가수 배호

2012.11.07 18:27

오작교 조회 수:4468

Baeho_1.jpg 전국을 강타한 배 호 공연 비화 (1967년11월-1971년 10월)

만약에 배호씨가 (배호씨는 호적나이 만 29세로 요절한지 올해로 30주년이 되기에 그를 사랑하고 숭배하는 전국의 올드팬들과 가요인들로 부터 적합한 예우를 받아 마땅하다는면에서 "배호님'으로 존칭되고있다)
10년, 이십년정도 더 살아 50세 정도까지만 살았다면 한국가요계는 지금과는 양상을 전혀 달리하며 크나큰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는 평이 그의 진면모를 잘아는 많은 최고 전문 가요관련인들의 조심스러운 그러나 확신에 찬 공통된 견해이다.

아마도 10대 20대를 제외한 성인가요시장에서 주로 30대 40대,50초 팬들의 "가요계의 슈퍼스타 조용필"과 40대,50대 중년팬들의 "열광의 놀이마당의 트로트의 황제인 나훈아"와 함께 "40대 50대 60대 70초 중년 노년 올드팬층의" 심금의 호소력과 환상의 멀티한 음색과 악기같이 절규하며 치솟는 표현력의 말 그대로의 천의무봉 가창력을 자랑하는 배호"의 3각 메이져 체계로 판도가 형성되었을 것이며, 나훈아씨는 배호가 왕성한 활동을 하며 폭넓은 중장노년의 남녀 성인층 확보한 상태에서 지금처럼 독주가 어려울 것이며 현재 속칭 트로트 4인방의 인기는 지금처럼 빛을 보기 힘들것이다.

-참고로 전통가요 4인의 가수는 수년전 신설된 MBC 전통가요 프로에서 가장 존경하는 선배가수로 배 호의 노래를 감격하여 목이 메어 불렀다-

배 호는 종소리, 강, 산, 철새, 여인의 마음 등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시켜 노래한 한국가요사에 유일한 천재가수였다.

60년대 최고 히트곡 중 "동백아가씨" "동숙의 노래"는 한국 가요사에서 여자가수가 부른 최고의 주옥의 명가요중 명가요이며 그 노래를 부른 가수 들의 대표곡이다. 배호의 감정이입의 천재성은 이 곡들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배호가 70년에 취입한 이미자씨의 대표곡인 "동백아가씨"를 들은 사람은 필자를 포함 그 충격과 감동으로 이성을 잃을 정도로 밤새도록 술을 먹으며 그 노래 1곡만 계속 들으면서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술에 취해 엉엉 울었다는 말이 무성할 정도라한다.

배호의 진면목을 가슴속 영혼속으로 느끼며 술 좋아하는 중장년 배호 매니아 남녀들에게는 재미있는 경험담 표현이 있다.

자신들이 역시 무척 좋아하는 스타 "남진" "나훈아"의 건강한 노래를 들으며 술을 먹을 때는 노래 몇곡 들으면서 기분 좋게 여유있게 술 한잔-소주 기준-하게 되나, 배호의 애절하며 가슴을 파고드는 노래에 일절에 한잔, 이절에 한잔 계속 마시며 주체할 수 없는 슬픔과 감동의 충격으로 노래 몇 곡들으면 술한병은 금방 없어지고 계속 몇 병씩 마신뒤 술에 취해 노래에 취해 목놓아 그의 노래를 부르며 그를 그리며 그의 요절을 아쉬어하는 나머지 너무나 일찍 떠난 자신들의 우상 배호의 이름을 부르며 "그렇게 일찍 죽어 나를 이렇게 고통스럽게 만드는 나쁜 형님, 오빠 , 당신"하며 원망어린 욕설과 함께 그의 운명을 저주하고 설움에 겨워 흐느껴 우는 사람도 많다한다.

이미자씨는 동백아가씨의 외형적인 님을 향한 애뜻한 마음을 여성특유의 섬세한 감정으로 차분히 노래했다면 배호가 부른 그것은 동백아가씨의 내면으로 파고 들어 사랑의 아픔으로 거의 광란의 상태 일보직전의 여자의 한 맺힌 마음을 남성의 섬세하고 애절한 감정이입으로 생생히 되살려내고 있다.

이런 놀라움은 판소리 "춘향전'에서 "쑥대머리'를 부르며 한맺힌 여성의 사랑의 그리움을 절규한 극소수의 남자 명창들만 가능한 감정이입,천재적 가창의 경지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고도의 성악예술의 경지인 것이다.

배호의 공연을 한 번이라도 직접 내지는 생존시 그의 노래하는 모습을 접한 사람들을 상당 기간 동안 무작위 표본 조사한 결과 그들은 수십년이 흐른 뒤에도 배 호의 감동은 지금도 너무나 리속에 뚜렸히 살아있으며, "우리나라에 나아가 이 세상에 노래를 잘하는 사람들, 가수들이 많다하지만 -배 호처럼 잘 한다해도 그렇게 노래 잘하는 가수는 없다-"라는 말이 일반인들의 하나같은 추억의 감동의 촌평으로 확인되었다.

올드 가요애호가들 중에는 흘러간 옛노래를 기가 막히게 부르는 배호의 노래에 심취되어 이렇게 옛노래를 그 당시 자신들이 듣고 보았던 원가수를 능가할 정도로 잘 부르는 가수가 세상에 있을까라는 놀라움에 감탄하다 뒤늦게 배 호의 "돌아가는 삼각지" 등 그의 주요 대표곡도 알게 되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감명을 받았다고한다.

배 호 노래의 예술적 완벽성은 그의 노래를 듣다가 다른 가수들의 노래는 노래의 맛과 흥취를 못 느끼어 들을 수 없다는 메니어들과 가요전문인들의 지론일 정도로 배호는 마치 핵폭탄과 같은 위력으로 명실상부한 국민가수의 칭호와 함께 구슬프고 한맺힌 "타향살이'등의 옛노래는 중국 조선동포, 러시아 동포,북한동포, 일본 교포 및 미국 등 재외 교민들의 마음을 사로 잡으며 공연과 방송 활동을 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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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은 배 호의 무대공연 비화 (1967년.11월-1971년 11월) -

1967년 2월 발매된 "돌아가는 삼각지"와 9월 "안개낀 장충단공원" 전국적 히트로 무명 신인가수에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배 호!
그 해 1967년 11월 7일 배 호의 최초의 호남지역 지방공연을 시작으로 사망한1971년 11월 7일까지 정확히 4년 - 운명의 장난인지 날자가 동일함!- 1971년 10월까지 짧았던 4년여의 당대 최고인기가수중 한 사람으로 서울의 시민회관 공연 및 지방극장공연 등에서 열광적인 인기를 얻으며 아픈 몸을 이끌고 열창하여 장내를 숙연하게 하면서 박수갈채를 받은 이야기 등 1960년대 후반 전국 지방극장쇼 등 공연에서 최고의 인기로 대중들을 울리고 웃기며 찬사를 한몸에 얻었던 배 호!-

- 전성기 시절의 배 호의 무대 공연 I -

1968년 대한민국 전국 구석구석까지 퍼진 배 호의 인기, 하늘을 찌를듯한 인기 절정.

1968년 3월부터는 작년에 최고 인기가수로 성공후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자 병원의 집중적이고 다각적인인 치료와 투약으로 기적적으로 거의 몸이 완쾌된 배 호는 "병마가 이제 내 몸에서 사라진 것 같다"라고 말하며 주위의 축복속에 건강한 모습으로 본격적인 왕성한 가수활동을 하면서 특히 지방공연을 활발히 하게된다.

아세아레코드사의 간판가수로 68년에는 전 우작사 나규호작곡의 "누가울어" ,"안개속으로 가버린 사랑" "당신" 등 가요계의 주옥같은 신선한 격조있고 대중성까지 풍부한 노래들을 발표하자마자 정상의 인기도에 힘입어 빅히트 행진 , 그해 11월에는 최희준, 남진을 앞서며 한국가요계의 인기판도를 바꾸며 입지를 완전 구축하여 전국적인 인기절정에 오르게 되며 'TBC 방송가요대상', 'MBC 10대가수상', 'KBS 가요대상' 수상 등 주요가요상을 휩쓸며 본인의 말대로 " 내 생애 최고의 한 해이다"할 정도로 최정상의 인기가도를 달리게 된다.

- 부유한 사회에서 음악은 장식품 이지만 당시 국민 소득 200불대의 대한민국에서는 대중가요는 고단한 대중 서민들을 위로해준 삶의 전부였다.-

이러한 양상은 현재에도 유효하여 러시아 및 북한 등 동남아 국가, 아프리카 여러나라 토속문화가 생활을 지배하며 중남미의 여러나라 특히 쿠바, 브라질 등 경제적으로는 계발 도상국가들 에게서 볼 수 있는 활발한 대중문화 활동- 삼바축제 및 차차차,삼바 ,보사노바 등 대중음악-이 국민 절대다수가 물질적으로 궁핍한 서민들의 피곤한 삶을 이기고 낙천적으로 현실을 즐기는 인생의 응원가로 크나큰 역활을 하는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대중문화, 대중가요 는 이렇게 국민생황를 지배하는 대중의 삶의 물결인 것이다.

당시 서울 등 대도시에는 TV보급이 미미하였고-수십 가정에 1대정도- 지방 시골에는 그나마 거의 TV가 보급이 않되었던 시절이었다. (1971년 대한민국 GNP 278불이었음)

66년 강원도 산골 면에 살던 필자의 기억으로는 당시 가요를 접하려면 음반 자체가 귀했고 동네 전파사에서 저녁이면 틀어주는 가요 등 음악을 그 앞에 한참서서 들었으며 유일한 매체는 라디오로서 집집마다 있었다.

조그만한 라디오 아니면 나무로 만든 정사각형 라디오에서 나오는 KBS 방송을 통해 뉴스,가요,연속극을 즐겨 들었는데 그당시 낮12시 55분에 어김없이 방송되던 북한의 비참한 실상을 풍자해서 방공정신을 고취시켰던 "김삿갓 북한방랑기'가 한참 인기였을 때 인기가수들의 목소리와 노래도 보잘것 없는 라디오이나 너무나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이런 시대상황에서 당시 인기가수들과 배 호의 노래는 KBS라디오 전파를 타고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퍼져나가며 너무나 개성적이고 호소력의 배 호의 노래는 전국민들의 마음속에 파고 들어가서 심금을 울려 주었으며 전국민이 농사일 하면서 쉬면서 거의 하루 온종일 라디오를 애청하였던 국민소득이 200불대이던 (1971년 278불임) 그 빈곤의 60년대 , 라디오는 전 국민에게 요즘의 TV나 컴퓨터이상의 소중한 문명의 이기로 신문과 잡지마저 쉽게 접할 수 없던 시절 거의 유일하게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게 해주는 귀한 존재로서 유명가수의 노래는 전국민의 영화를 제외한 일상생활의 유일한 오락매체로서 배 호를 포함한 당시 유명가수들의 히트곡은 라디오를 통해 전국민에게 전달되어 생업에 지치고 무료한 국민들에게 즐거움과 마음의 위로를 주며 요즈음 TV쇼프로 이상의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얼굴은 전혀 볼 수없고 노래로써 전국민을 울고 웃기던 선망의 대상이었던 유명 가수나 영화배우 그 주인공을 보기위해 유일한 방법은 극장쇼는 당연히 엄청난 큰 인기를 얻었으며 많은 인기가수들과 함께 68년부터는 특히 배 호의 출연요청이 쇄도하게 되었다.

이 때 나온 배 호의 인기를 알 수 있는 잡지의 글을 소개한다.

1968년 7월에 나온 '배 호' 사망 해프닝.
(1968년 모 유명연예잡지 8월호에서 MBC "가요일번지"의 정봉화 PD의 글)

당시 그가 출연한다는 선전을 듣고 그를 보기 위해 입장한 대다수 많은 열성 팬들은 공연이 겹치는 바람에 배호가 출연 안하면 경우가 종종 발생하면 난리법석의 광적인 상태로 변해 난리 법석을 피우는 경우가 많았다한다.

찌리링....책상에 놓인 전화벨이 울렸다.
"예 문화방송 음악부 입니다"
"저.... 뭐 한 가지 여쭈어볼 것이 있는데요, 다름이 아니라 가수 배 호씨가 죽었다는데 그게 정말입니까? "

제기랄! 또 그 전화구나! 벌써 이런 전화를 오늘만 해도 50번 이상이나 받았으니 신경질이 않난다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다.
하나 어쨌든, "무엇때문에 왜 이런 풍문이 나왔을까?"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이다.
하기야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을 했었고 지금도 몸이 약해서 고전하고 있기는 하지만 건강이 차차 회복되면서 서울과 지방무대 공연으로 인기가 절정이라는데 죽었다니 원.....

이런 풍문에 대해서 일설에는 '배 호'의 인기를 시샘하는 몇몇 가수들이 만들어 퍼뜨린 것 이라고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배 호'의 건강을 염려한 나머지, 팬들이 산 사람을 죽었다고하면 그 사람의 수명이 길어진다는 일종의 미신에 집착한 나머지 만들어낸 것일거라는 말도 있지만 아무리 배 호의 인기를 시기한다고해서 죽었다는 말을 퍼뜨리고 다닐 그런 악질은 우리 가요계에 없을 터이고, 또 아무리 열렬한 팬들일지라도 '죽었다'라는 끔직한 말로 그의 건강을 회복 시키려고 하지는 않을게다.
이런 저런 생각을해본 결과 이런 풍분의 원인이 다음과 같은 것으로 알아내게 되었다.

1968면 7월 어느 쇼흥행사가 지방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배 호"를 출연시킬 것으로 예정하고 대대적인 선전을 해 놓았다.
그러나 배 호는 이 보다 먼저 다른 흥행사와 (서울쇼) 공연계약을 했으므로 그만 그 쇼에는 출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배 호는 68년 7월 아픈 몸을 이끌고 16일간 지방공연 강행함. 이제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었을까?

'배 호'군이 출연한다는 선전에 그 작은 시골 극장은 그야말로 초만원을 이루었는데 쇼가 다 끝나가도 정작 주인공인 '배 호'군은 무대에 당연히 나타나지를 않았다는 것이다.
기다리다 못한 관중들은 드디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 야, 배 호 어디갔니?"
" 배 호 나와라!" "사기다 사기"! "돈 도루 내라"
이크 기어코 이거 큰일이 났다. 극장유리창이 깨지고 무대악사석으로 사이다병이 날아들고.......
보통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사회자는 순간 묘책을 머리에 떠올렸다.
 사이다병, 맥주병,카라멜 빈갑, 담배꽁초,휴지뭉치 등 벼라별 것들이 마구 날아오는 무대위로 사회자가 결사의 각오를 하고 나왔다.

"여러분 진정하십시오!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오늘 '배 호'군은 이 극장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사기는 아닙니다. 물론 오늘 쇼에 나올 예정이었습니다마는......"
"집어쳐라!" "돈 도루 내라!" "배 호 나와라!" 하는 아우성과 함께 갖가지 비행물들이 여전히 무대위로 난무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자의 말도 계속되었다.

"틀림없이 이 쇼에 나올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출발하기 전날 갑자기 병이 재발되어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만...... "

여기서 사회자는 잠시 말을 끊고 흐느끼더니
"...... 그만......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

순간 장내는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여기 저기서 흐느껴우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 배 호가 죽었데! " "흑흑 불쌍해라!"

이렇게해서 이 소동은 수습이 되었지만 이 사건의 부산물로 엉뚱하게도 "배 호 사망설"이 퍼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예 어떻습니까? 그럴듯 하죠! 이 얘기가 사실인지는 덮어두고 비슷하게 생각이 되거든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짧은 글을 쓰고있는 동안에도

찌르르릉! " 문화방송이죠? 저, 배호가 죽었다는데 정말에요? "
찌르르릉1 " 저...... 배호가 죽었다는데 그게 정말입니까? "
찌르르릉! " 배 호가 죽었다죠? " 찌리리링! 찌리리링!

"이거 신경질이 나서 살겠나? 배 호야, 너 어데 있니? 엉?
염려마십시오. 배 호는 건강을 차차 회복해 가면서 멀쩡하게 건재하고 있습니다"

사회자가 위급상황을 넘기기위해 거짓말로 한 배호가 갑자기 돌아갔다는 말을 들은 관중들의 반응은 대단한 충격이었고 무사히 쑈가 끝났다는 웃지 못할 유명한 일화이다.


"흐느끼며 애원하며 끈끈한 호소력의" 창법으로 특히 20대에서 40대 "여성팬들의 절대적인 인기를 한 몸에 받던 배 호의 공연.
** 모 주간지에서 발췌


1968년 말 최고 인기 남자가수로서 입지를 굳힌 배 호는 숱한 상장이 안겨진 영광과 달라박스라고 일컸었을 만큼 톱유지를 했었으나 그의 뒤안길의 개인적인 삶은 항상 허탈과 씁쓰름한 고통만이 따를 뿐인 외로운 삶 그 자체였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러한 고달픔과 그의 건강 악화를 우려한 가족들의 반대속에서도 굽히지 않고 배 호는 부산, 대구, 광주 등 각 지방 공연을 빠지지 않고 강행했었고 지방 공연 때엔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았다.

 

 

배호 발매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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