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나 / 신해철
2024.05.09 11:36
아버지와 나 / 신해철
아주 오래전 내가 올려다본 그의 어깨는
까마득한 산처럼 높았다
그는 젊고 정열이 있었고 야심에 불타고 있었다
나에게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었다
내 키가 그보다 커진 것을 발견한 어느 날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그가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이 험한 세상에서 내가 살아 나갈 길은
강자가 되는 것뿐이라고 그는 얘기했다
난, 창공을 날으는 새처럼 살 거라고 생각했다
내 두발로 대지를 박차고 날아올라
내 날개 밑으로 스치는 바람 사이로
세상을 보리라 맹세했다
내 남자로서의 생의 시작은
내 턱 밑의 수염이 나면서가 아니라
내 야망이, 내 자유가 꿈틀거림을 느끼면서
이미 시작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기 걸어가는 사람을 보라
나의 아버지, 혹은 당신의 아버지인가?
가족에게 소외받고, 돈 벌어 오는 자의 비애와
거대한 짐승의 시체처럼 껍질만 남은
권위의 이름을 짊어지고 비틀거린다
집안 어느 곳에서도 지금 그가 앉아 쉴 자리는 없다
이제 더 이상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아내와
다 커버린 자식을 앞에서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한
남은 방법이란 침묵뿐이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아직 수줍다
그들은 다정하게 뺨을 부비며
말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그를 흉보던 그 모든 일들을
이제 내가 하고 있다
스폰지에 잉크가 스며들 듯
그의 모습을 닮아 가는 나를 보며,
이미 내가 어른들의
나이가 되었음을 느낀다
그러나 처음 둥지를 떠나는 어린 새처럼
나는 아직도 모든 것이 두렵다
언젠가 내가 가장이 된다는 것
내 아이들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 무섭다
이제야 그 의미를 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그 두려움을
말해선 안된다는 것이 가장 무섭다
이제 당신이 자유롭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나였음을 알 것 같다
이제, 나는 당신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랜 후에,
당신이 간 뒤에, 내 아들을
바라보게 될 쯤에야 이루어질까
오늘밤 나는 몇 년 만에 골목을 따라
당신을 마중 나갈 것이다
할 말은 길어진 그림자 뒤로 묻어둔 채
우리 두 사람은 세월 속으로
같이 걸어갈 것이다
댓글 2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공지 | 하루에 한 곡 추천곡을 올립니다. | 오작교 | 2022.07.15 | 5462 |
74 | 목이 멘다 / 김도향 | 오작교 | 2024.09.24 | 37 |
73 | 천사의 미소 / 조덕배 | 오작교 | 2024.08.30 | 200 |
72 | 비 오는 거리 / 백합유리잔 | 오작교 | 2024.07.29 | 955 |
71 | 연인 / 린애 [2] | 오작교 | 2024.07.05 | 1187 |
70 | 길 위에서 / 최백호 | 오작교 | 2024.05.16 | 2530 |
» | 아버지와 나 / 신해철 [2] | 오작교 | 2024.05.09 | 2499 |
68 | 영화 Daniele e Maria OST - La Luce(첫 산책) / Nicola Piovani | 오작교 | 2024.03.13 | 3119 |
67 | Mama / Paul Mauriat | 오작교 | 2024.03.13 | 3098 |
66 | 목마른 장미 / 박혜신 | 오작교 | 2024.02.12 | 3182 |
65 | I Saw You Dancing / Yaki-Da [1] | 오작교 | 2024.01.27 | 3097 |
64 | 쓸쓸한 연가 / 사람과 나무 [2] | 오작교 | 2024.01.13 | 3095 |
63 | Albatrosz / Szentpeteri Csilla | 오작교 | 2024.01.06 | 3045 |
62 | La Bambola(인형) / Elenoir | 오작교 | 2024.01.01 | 3016 |
61 | Oblivion / Astor Piazzolla | 오작교 | 2023.12.27 | 3053 |
60 | Birth / Renara Akhoundova | 오작교 | 2023.12.27 | 2835 |
59 | 기다림, 설레임 / 강허달림 | 오작교 | 2023.12.27 | 2942 |
58 | 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 / 김상희 [1] | 오작교 | 2023.08.24 | 3394 |
57 | Recordar É Viver(추억은 영원히) / Vitor Espadinha | 오작교 | 2023.08.11 | 3075 |
56 | 하늘이 날 부를 때까지 / 이헌승 | 오작교 | 2023.07.28 | 3009 |
55 | 영화 쉘부르의 우산 OST [1] | 오작교 | 2023.07.14 | 305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