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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세 이문세

2015.03.11 16:38

오작교 조회 수:4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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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세는 1983년에 데뷔하여 '발라드'라는 장르를 도입, 정착시키며 한국 대중음악에 새로운 조류를 끌어들인 가수이자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을 오랫동안 진행했던 DJ이기도 하다.

사실 이문세가 본격적으로 대중들에게 어필하기 시작한 시점은 1985년 그의 3집 「할 말을 하지 못했죠/휘파람」(1985)가 히트하면서이다.


그가 그 이전에 발표했던 두 장의 앨범, 1집 「비 되어 내려다오/오마니」(1983)과 2집 「The Best」(1984)는 거의 대중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었을 뿐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소위 '이문세스러움'을 가지지 못한 앨범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문세스러움'은 바로 우리가 이제는 흔하게 쓰는 말인 '발라드' 음악이었는데, 유려한 키보드와 클라이맥스를 이끌어 내는 밀도 있는 편곡, 감미로운 멜로디, 현악 구성 등으로 대표되는 이 같은 양식의 대부분은 사실상 작곡가이자 그의 스승이며 파트너인 이영훈의 것이었다.  


이문세는 3집부터 이영훈과 본격적인 작업을 행하는데, 어느 특정한 곡이 히트했다기 보다는 앨범 전체의 곡이 스테디하게 인기를 끄는 저력을 보여주었다(당시 음악계의 추세이기도 했다). <난 아직 모르잖아요>로 공중파의 정상을 점하고 <소녀>, <할말을 하지 못했죠> <휘파람> 등을 연달아 히트 시키며 4집 「사랑이 지나가면/깊은 밤을 날아서」(1987)에서는 거의 앨범의 전곡을 히트 시키기도 했다. 이 시기를 이문세의 전성기라고 보아도 무방한데, 특히 이 앨범의 발라드 곡들, <사랑이 지나가면>, <그녀의 웃음소리뿐>, <밤이 머무는 곳에>와 같은 곡들은 이후 수많은 발라드 가수들이 애청하고 영향을 받는 대표적인 명곡들이 되었다.


곧 이어 발표한 5집 앨범 「이문세 5집」(1988)은 비록 판매고나 인기도 측면에서 4집에 못 미쳤지만 오히려 기억에 남는 몇몇 트랙들이 수록됨으로써 지금까지도 즐겨 방송되는 작품이 되었다. <시를 위한 시>, <광화문 연가>, <붉은 노을> 등은 매우 스테디하게 인기를 모으는 곡들이다. 특히 5집에서는 대규모 현악 오케스트라를 세션에 참가 시켜 제작비가 높게 책정, 테이프와 LP의 가격을 올리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 해프닝이 있기도 했다.


이문세는 6집 이후 소녀취향의 발라드에서 벗어나 보다 다양한 음악을 펼쳐보이게 되는데 6집 「이문세 6집」(1989)은 이영훈과 이문세가 조국과 민족, 사회를 생각하는 시선을 적절히 담아낸 앨범으로 <그게 나였어>, <장군의 동상>, <해바라기> 같은 히트곡을 남겼다. 7집인 「이문세 7집」(1991)은 그로서는 2집 이후로는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는 대중적인 실패였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옛사랑>과 같은 곡이 성인층을 중심으로 적잖이 히트했지만 고급스럽고 재지한 이미지를 주는 대부분의 곡들이 대중적인 호응을 얻어내는 데는 실패한 앨범이었다.  


이 앨범의 부담과 이영훈의 독자적인 음악 공부를 위해 이후 이문세는 잠시 이영훈과 결별하게 된다. 그리고 내놓은 앨범이 바로 <종원에게>가 수록된 8집 「Lee Moon Sae」(1993)이다. 당시 가장 주목 받던 음악 감독들인 김현철과 유정연, 빛과 소금과 함께 작업한 이 앨범은 <한번쯤 아니 두 번쯤>, <종원에게> 등의 곡이 공중파를 타며 인기를 모았다.  


서태지가 몰고 온 댄스와 랩의 열풍이 절정을 치닫고 있던 1995년, 이문세는 오랜 동료 이영훈과 함께 매우 회고적이며 고전적인 느낌의 발라드 앨범인 9집 「95 Stage With Composer Lee Younghun」을 들고 나오게 되는데, 왕년의 명콤비였던 김명곤에게 편곡을 맡기고 신세대 음악인인 김형석을 참여 시켜 조화를 꾀했지만 댄스위주로 재편된 시장에서 뼈저린 실패를 맛보게 된 앨범이었다. 이 앨범에 수록된 <영원한 사랑>은 음악적으로는 그 어떤 이문세의 곡보다도 뛰어난 완성도를 가지고 있는 작품으로 이승환과 정석원이 이 곡을 듣고 <천일동안>의 편곡을 구상했다는 이야기가 알려져 있기도 하다.  


9집의 실패에 대한 부담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의 10집 「화무(花舞)」(1996)에는 젊고 유능한 아티스트들이 대거 참여, 보다 다양한 색깔을 담아 내었다. 특히 유희열이 만들고 이적을 객원가수로 참여 시킨 <조조할인>은 정말 오랜만의 공중파 넘버원곡으로 기록되게 되었다. 어쨌든 대중적으로 10집은 그의 재기작임이 분명했다. 그의 11집 「Somtimes」는 이 같은 작업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나원주, 정재형, 조규찬, 조규만 등 젊은 프로듀서들을 다시 한번 기용했으며 이문세 본연의 색은 약해졌지만 <Solo예찬>과 같은 대중적인 히트곡을 내놓게 된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에 대한 자신감을 얻은 이문세는 이영훈과 다시 만난다. 그의 12집 앨범의 제목은 「휴(休)」(1999)였는데 어느 정도 자신의 가요생활을 돌아보며 제작한 회고적인 작품이었다. 이소라와 함께 부른 <슬픈 사랑의 노래>가 사랑을 받았지만 앨범의 전체적인 완성도에 비해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모은 앨범은 아니었다. 이영훈과의 오랜 작업은 가장 최근에 발매된 「Chaper 13」(2001)으로까지 이어진다.

 

예전의 감미로운 맛은 없지만 풍부하고 노련한 대가들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이 앨범에는 <기억이란 사랑보다>가 수록되어 그가 여전히 변함없는 발라드의 대가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