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es Story
2014.01.07 14:58
락은 충전되기 위해 항상 블루스(Blues)로 돌아가야 하는 전지와 같다 - Eric Clapton
록을 하는 사람에게 Blues는 하나의 강박관념처럼 따라붙는다.
미국과 영국에서 록 아티스트치고, 심지어 팝 뮤지션까지도 이 용어를 들먹이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영미사회의 대중음악은 팝으로 표현되고 세계 젊은이들의 대중음악은 록으로 상징되지만, 팝을 하는 가수나 록을 하는 연주자나 참으로 많은 사람이 입버릇처럼 "블루스(Blues)를 해야 한다"고 읊어댄다. 록의 '경지'에 도달한 록 음악인이라도 자기 음악 여행의 종점을 블루스(Blues)로 삼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무엇 때문에 로커들이 블루스(Blues)를 신주 모시듯 섬기는 걸까?
그 이유는 간단명료하다. 록의 조상이 바로 블루스(Blues)이기 때문이다. 지금 파고 있는 음악 작업의 뿌리가 블루스(Blues)인 만큼 그들이 블루스(Blues)를 자주 언급하고 거기로 돌아가려 함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이치 아니겠는가? 1992년 <천국의 눈물>(Tears in Heaven)을 크게 히트시킨 '기타의 신(神)' 에릭 클랩튼은 그래서 이러한 유명한 말을 남겼다.
"록은 충전되기 위해 항상 블루스(Blues)로 돌아가야 하는 전지와 같다."
록의 기본은 블루스(Blues)로의 회귀로서 충실을 기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의 발언처럼 <천국의 눈물>은 한편의 감동적인 블루스(Blues)였다.
초창기 로큰롤의 거인 척 베리(Chuck Berry)의 언급도 의미가 깊다.
"그것은 블루스(Blues)로 불리곤 했다. 그리곤 리듬 앤 블루스(Blues)로 불렸다. 지금 그것은 록이라 불린다."
록의 생성사(生成史)를 단 세 문장으로 압축해 묘사했다.
현대 젊은이의 대중음악을 가리키는 록은 따라서 블루스(Blues)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블루스(Blues)를 이해하지 못하면 곧 록을 이해할 수 없으며 록을 이해하지 못하면 대중음악의 큰 가지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흔히 록의 특성을 현장성, 폭발성, 저항성, 민중지향성, 공동체의식 등으로 언급한다. 이 대부분의 성질을 블루스(Blues)로부터 배웠다. 블루스(Blues)는 '록의 교사'이기도 한다.
블루스(Blues)는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끌려온 흑인 노예들의 음악이다.
미국 남부지방, 특히 미시시피 델타 목화밭에서 노동하던 흑인 노예들은 아프리카 음악의 전통을 미국의 새로운 환경에 적응시켜 블루스(Blues)란 음악을 창조해냈다. 따라서 블루스(Blues)는 본질적으로 '아프리카적 미국'(African-America)음악이다.
블루스(Blues)는 음악적으로 따지면 독특한 방식을 보유하고 있다. 도레미파솔라시도 7음 가운데 미와 시가 반음 내려가고(b), 파는 반음 올라가(#) 3음이 블루지한 상태를 보인다. 그러나 그것도 정확이 반음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이 아닌 피아노로는 어려운 미분(微分)음의 개념이다.
또한 코드 진행상 '도미넌트 코드'(Ⅴ)앞에 '서브 도미넌트 코드'(Ⅵ)가 위치하는 일반 패턴과 달리 도미넌트가 서브 도미넌트에 앞선다. 또한 도레미파솔라시도 아닌 도시라솔파미레도의 순으로 높은 음에서 내려오는 이른바 하행(下行)선법이다. 여러모로 클래식이 확립해놓은 양식과 개념에서 일탈해있는 음악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블루스(Blues)의 탄생 배경에서 '흑인노예' 및 '목화밭에서의 노동'이라는 점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흑인노예란 피압박 인종을 뜻하며, 목화밭에서의 노동이라는 것은 블루스(Blues)가 노동가(勞動歌)혹은 노동민중(勞動民衆)의 가요임을 알려준다. 블루스(Blues) 선법이 다른 것도 실은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억압받는 사람의 소리이기에 거기엔 '저항의 요소'가 내재해 있다. 분위기와 자극이 가해지면 일시에 분출하고야 마는 폭발성이 있다. 말 그대로 '휴화산'이다. 초창기 백인 주인들이 드럼을 금지시켰던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흑인 노예들은 자신들의 고향인 아프리카에서 타악기의 비트에 맞춰 노래하고 춤추는 전통을 지녔기에 이를 그냥 내버려두면 종족적 통일성이 고무되고 나아가서는 백인 주인들에 대한 반항과 폭동을 일으킬 불상사의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인들은 드럼을 금지시키는 대신, 내키는 대로 노래하는 흑인들에게 순종을 유도하기 위한 목적에서 유럽스타일의 음악을 가르쳐주었다. 이로써 민중적이고 슬픈 음조를 띠는 블루스(Blues)에 음악적 체계가 잡힌다. 이 때문에 블루스(Blues)는 '아프리카에서 날아온 씨앗이 유럽의 양분을 흡수하여 미국 땅에 뿌리내린 음악'이라고 정의되는 것이다.
<Charley Patton>
<Son House>
<Robert Johnson>
목화밭 농장에서 절규하듯 소리를 질러대는 필드 할러(Field Holler)에서 노예들 상호간의 의사전달방식인 콜 앤 리스펀스(Call and Response)로 발전, 남북 전쟁과 노예해방 이후 흑인 민요로 정착된 블루스(Blues)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쯤 혼자서 노래하고 반주하는 스타일로 굳혀진다.
훗날에 비해 원시적 필(feel)이 많이 간직되어 있고 지역적으로 '촌'에 머무르고 있었다 하여 이 형태를 시골 블루스(Blues), 즉 컨트리 블루스(Blues)(Country Blues)라 일컫는다.
미시시피 델타가 원산지이기 때문에 이에 중점을 둔 델타 블루스(Blues)(Delta Blues)란 어휘도 있는데, 컨트리 블루스(Blues)의 구체적 형태라 파악하면 무리가 없다. 델타 블루스(Blues)의 명인으로는 찰리 패튼(Charley Patton), 선 하우스(Son House), 로버트 존슨(Robert Johnson) 등이 손꼽힌다.
<Muddy Waters>
<B.B. King>
<John Lee Hooker>
그러나 1차 세계대전(1914∼1918)의 소용돌이 속에서 남부의 흑인들은 대거 북부도시로 이동해갔다. 특히 그들은 일리노이즈 중앙선의 종착지인 시카고로 대부분 몰려갔다. 그들 가운데 블루스(Blues)맨들이 끼어 있음은 물론이었다.
이제 컨트리 블루스(Blues)의 수도는 시카고로 옮겨갔다. 블루스(Blues)맨들은 '제2의 고향'인 시카고의 도시적 환경에 맞추어 컨트리 블루스(Blues)로부터 '촌티'를 벗겨내기 시작했다. 20년대 무렵 컨트리 블루스(Blues)는 소리에 고급적 터치를 더해주는 피아노와 결합했고(블루스(Blues)와 재즈가 어깨동무하던 시기) 급기야 전기기타와 앰프를 앞세우게 되었다.
작고 침울한 컨트리 블루스(Blues)는 따라서 한층 소리의 덩치가 커지고 밝은 기운이 감돌았다. 대도시의 규모, 긴장, 혼란 등의 복잡한 정서가 침투한 것이다. 이것이 도시 블루스(Blues)(City Blues)요, 시카고 블루스(Blues)였다.
1930년대에 이르러 시카고 블루스(Blues)는 전보다 더 빠르고 경쾌한 리듬이 강화되어 '그에 맞춰 춤도 출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났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리듬 앤 블루스(Blues)(Rhythm and Blues)로 명명했다. 하지만 원초적 형태의 컨트리 블루스(Blues)는 이쯤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리듬 앤 블루스(Blues)는 체스 레코드사의 머디 워터스와 하울링 울프, 모던 레코드사의 B.B. 킹, 엘모어 제임스, 존 리 후커등과 같은 거물을 탄생시켰다. 이들은 모두 델타 블루스(Blues)의 로버트 존슨, 찰리 패튼의 음악을 듣고 도시에서 꿈을 펼치고자 했던 인물들이었다.
<Elvis Pres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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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s Domino>
<Little Richard>
1950년대 들어서 리듬 앤 블루스(Blues)는 대중음악계에 돌풍을 야기했다. 흑인 민권운동이 급속도로 확산되기 시작한 이때 쯤 리듬 앤 블루스(Blues)는 모든 흑색인조의 '정서적 기틀'로 작용했고 인종적 분위기가 악화된 탓에 백인들도 덩달아 좋아했다.
대중들의 반응은 날로 치솟아 올라갔다. 이후 리듬 앤 블루스(Blues)는 백인의 음악인 컨트리 앤 웨스턴(Country and Western)과 우호적 관계로 돌입하여 '대연합'을 빚어낸다. 2차 세계대전으로 흑인미군과 백인미군이 함께 전쟁터로 나가 자연스런 '흑백결합'이 빈번해진 결과였다.
리듬 앤 블루스(Blues)와 컨트리 앤 웨스턴이 서로의 양분을 섭취하여 구현한 결정체가 바로 록큰롤이었다. 록큰롤은 흑과 백의 인종적 냄새가 제거되었기에 곧 대중적이 될 수 있었고 '흑의 우울과 저항성' '백의 경쾌와 공격성'이 혼합되었기에 젊은이들을 대변할 수 있었다. 보 디들리, 처크 베리, 팻츠 도미노, 리틀 리차드, 엘비스 프레슬리, 제리 리 루이스, 버디 할리 등이 로큰롤 대중화에 혁혁한 공을 세운 스타들이었다(흑인과 백인이 고루 섞여 있다).
하지만 엄정한 분석을 하자면 블루스(Blues)와 컨트리 둘 가운데 입김이 더 거셌던 것은 블루스(Blues)였다. 세계 팝 전문가들은 '록'이란 거대한 나무의 성장에는 블루스(Blues)의 영향이 훨씬 지대했다고 단정짓고 있다. 록의 대체적인 기질은 앞서 지적한 대로 블루스(Blues)로부터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록 음악인들이 스스로 입증했다.
초창기 록큰롤이 광풍을 일으킨 뒤 스타들이 우연한 '고장'(엘비스의 입영, 척 베리의 수감, 리틀 리처드의 은퇴 등)으로 침체기를 맞고 낙관적 시야의 서핑 뮤직과 스탠더드 팝이 다시 유행하는 '반동기'에 접어들면서 록과 블루스(Blues)는 전면에서 후퇴하고 만다. 그것이 60년대 초반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록의 뿌리가 이미 깊게 내려진 만큼 블루스(Blues)도 끊임없이 '부활'을 거듭했다. 부활의 신호탄은 1964년 비틀즈의 미국 상륙으로 시작된 '영국의 침공' 때였다. 미국에 온 존 레논, 믹 재거, 에릭 버든 등의 입에서 블루스(Blues)맨의 이름이 마구 튀어나왔으며 그들의 음악에 영향을 받았다고 털어놓는 것이었다.
<Janis Joplin>
<Jeff Beck>
<Jimi Hendrix>
1950년대에 로큰롤이 폭발적인 붐을 이룰 때 이미 영국과 미국의 젊은이들은 로큰롤의 근원을 찾기 시작했고 그리하여 리듬 앤 블루스(Blues)로 거슬러 올라가 그 바탕인 블루스(Blues)를 찾아냈다. 1968년에는 대규모의 '블루스(Blues) 리바이벌'이 대중음악계를 강습했다. 이때 몇몇 아티스트들은 그 옛날의 컨트리 블루스(Blues)까지 선보이기도 했다. 블루스(Blues)가 당시 환영을 받게 된 것은 반전과 민권운동 대열에 선 학생들이 피압박 민족의 음악인 블루스(Blues)에 '입장의 동일함'을 확인한 까닭이었다.
영국에서는 지미 헨드릭스(미국인이지만 영국에서 활동했다), 에릭 클랩튼, 제프 백, 앨빈 리, 레드 제플린이 블루스(Blues) 중흥의 기수들이었다. 미국에서는 남부 텍사스 출신 가수들이 주류를 형성해 재니스 조플린, 자니 윈터, ZZ 탑, 스티브 밀러, 올맨 브라더스,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 등이 블루스(Blues)를 들려주었다.
블루스(Blues)를 혁명화했다는 평을 들은 지미 헨드릭스의 우상은 시카고 블루스(Blues)의 머디 워터스, 하울링 울프, 엘모어 제임스였고 그 블루스(Blues)맨들은 에릭 클랩튼의 영웅들이기도 했다. 제프 백과 텐 이어즈 애프터(Ten Years After)라는 그룹을 이끈 앨빈 리는 윌리 딕슨의 블루스(Blues) 고전을 재해석해 선보였다. 앨빈 리의 경우는 존 리 후커의 뒤를 따라다니며 블루스(Blues) 기타주법을 습득했다.
재니스 조플린에게 가장 영향을 준 사람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블루스(Blues) 여가수 베시 스미스였고, 재니스는 "블루스(Blues)는 내 노래의 전부"라고 주장했다. 시카고에 가서 하울링 울프, 제임스 카튼 등 블루스(Blues)맨과의 접촉을 가진 스티브 밀러는 자신의 그룹이름을 '블루스(Blues) 밴드'라 정했다.
블루스(Blues) 곡을 연주한다고 무시당해왔던 자니 윈터는 소니 보이 윌리암즈와 머디 워터스와 블루스(Blues) 오리지널을 각색한 첫 앨범으로 갑작스런 유명세를 치렀다. 빌리 기본즈도 래리 윌리암즈, 지미 리드, 티본 워커, B.B. 킹의 노래를 듣고 블루스(Blues)를 전공하여 나중 그룹 ZZ 탑을 유명 밴드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Mike Bloomfield>
<Albert King>
<Howlin' Wolf>
블루스(Blues)가 각광을 받으면서 블루스(Blues) 초기 거인들도 함께 재평가 받기 시작했고 무대의 전면에 다시 등장해 후배 록 음악인들과 한 무대에 서기도 했다. 존 리 후커, 머디 워터스, B.B.킹 앨버트 킹(B.B. 킹의 이복형제), 하울링 울프 등이 다시 세인의 주목을 받은 블루스(Blues)맨들이었다.
1968년 B.B. 킹은 마아크 블룸필드(시카고 태생의 기타주자로 펑크적 경향의 블루스(Blues) 그룹 일레트릭 플래그를 조직했다)의 천거로 필모어 웨스트무대에 공연한 뒤 이런 소감을 밝혔다.
"지난 63년 내가 공연했을 때 95%의 관중이 흑인이었다. 그런데 이번은 95%가 백인이었다.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마이크 블룸필드가 나를 위대한 블루스(Blues)맨이라고 소개했다. 내가 연주를 끝내자 관객들은 기립박수를 쳐주는 게 아닌가. 난 울고 싶었다. 말로는 그 감정을 표현할 수 없었다. 관객들에게 블루스(Blues)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블루스(Blues)가 그들이 말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블루스(Blues)는 '고통'의 음악이다. 그러므로 록도 고통의 음악이다. 블루스(Blues)는 흑인의 고통을 표현하며 록은 젊은이의 고통을 대변한다. 세상이 절망 어두움 억압에 가득찰 때 록은 블루스(Blues)에 의지해 깃발을 올린다. 우리의 세상이 온전치 않을 것이기에 록은 영원하고 그 뿌리인 블루스(Blues)도 호흡을 계속할 것이다. 이처럼 '젊음의 음악'은 고통으로부터 출발했다. 블루스(Blues)가 그렇게 가르쳐주었다.
[출처] 음악이야기 - 블루스 (Bl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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