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파렝(Louise Farrenc)
2015.09.29 13:12
Louise Farrenc (1804-1875)
Louise Farrenc은 프랑스 작곡가이자 비르투오조 피아니스트 였으며, 교사이기도하였다. 파리에서 Jeanne-Louise Dumont 이란 이름으로 태어났으며, 그녀의 아버지는 Jacques-Edme Dumont로 성공한 조각가였다.
Louise Farrenc은 자신의 삶동안 작곡가로서, 연주자로서, 그리고 교사로서 상당한 명성을 누렸다. Louise Farrenc은 일찌기 어린시절 Muzio Clementi의 제자였던 Senora Soria로부터 피아노를 배웠으며, 그녀가 전문적인 피아니스트로서 재능을 갖고이쑈음이 명백하게 드러났을 때 Ignaz Moscheles 와 Johann Nepomuk Hummel 같은 대가에게 렛슨을 받을 수 있었다.
그녀가 한편으로 작곡가로서 가능성을 크게 드러내기 시작했을 때, 그녀의 부모는 당시 음악원의작곡과 교수로있던 Anton Reicha에게 배울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 작곡클래스가 오직 남성들에게만 허용된 것이었으므로 Louise Farrenc 이 라이하의 작곡 클래스에서 수업을 받을 수 있엇는지에 대하여는 분명치 않다.
그녀는 풀룻 전공 학생이었던 자신보다 10년 연상의 Aristide Farrenc을 만났으며, Aristide Farrenc은 당시 자신의 가족들이 거주하고있던 Sorbonne의 예술가촌에서 정규적으로 열리고있던 콘서트의 연주에 참여하곤 하였다. 1821년 Louise Farrenc은 그와 결혼하였으며, 이후 그녀의 음악 공부는 단속적으로 이어졌고 남편과 함께 프랑스 각지역을 대상으로 연주여행을 하곤하였다. Aristide Farrenc은 곧 이러한 연주여행에 지쳤으며, 파리에 출판사를 내기로 결심하였다. 이는 Editions Farrenc으로 결과되었으며, 이후 약 40여년동안 프랑스의 주요한 음악 출판사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녀는 중단했던 공부를 Reicha를 통해 다시 시작했다. 공부를 온전하게 마친 후에 콘서트 연주자로서 이력을 다시 시작하였으며, 1830년대 동안 연주자로서의 상당한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1840년대 초반 그녀의 명성은 파리 음악원 피아노 교수에 영구 지명될 정도로 높아지게되었으며, 이 직위는 지명으로부터 30년간 유지하였으며, 당시 음악가에게 이러한 직위는 전 유럽에 있어서 음악가로서 오를 수 있는 가장 저명한 것 가운데 하나였다.
이러한 정황에도 불구하고 십여년동안 그녀가 연주자로서 받았던 급료는 상대편 남자 연주자에 훨씬 못미치는 것이었다. Joseph Joachim 이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참여한 그녀의 9중주의 초연이 압도적인 성공을 거둔 이후에야 그녀의 연주자로서의 급료는 Joseph Joachim 과 동등한 것이되었다고한다. .교사로서 그리고 연주자로서 이력 이외에 그녀는 초기음악 연주 스타일에 대한 영향력있는 책을 출판하거나 저술하였다. 그녀가 사망한 후 수 십년이 지났을 때 까지 연주자로서 그녀의 명성이 살아 남았으며, 그녀의 9중주는 두 곡의 피아노 오중주와 트리오와 더불어 1850년 대 까지 다소간의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그녀의 몇몇 실내악을 수록한 새로운 에디션들은 그녀가 사망한 이후 곧 망각속에 잊혀져갔다.
먼저 1820년대와 1830년대에 이르는 기간동안 그녀는 거의 압도적으로 피아노를 위한 작품들을 작곡하였다.이러한 작품들 가운데 몇몇 작품들은 슈만을 비롯한 비평가들로부터 높은 찬사를 이끌어낸 것이었다. 1930년대를 기점으로 그녀는 실내악 앙상블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들의 작곡을 대거 시도하게되었다. 그녀의 실내악 작품들의 상당 부분이 쓰여졌던 것은 1840년대 동안이었다. .패렝의 작품군의 압도적인 부분이 피아노를 위한 작품으로 할애된 반면, 그녀의 실내악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가장 탁월한 작품들로 평가받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패렝의 실내악 작품들이 동시대의 잘 알려진 남성작곡가들의 실내악과 동등한 위치를 점했다는 점을 통해 증명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녀의 삶동안 실내악은 그녀의 가장 커다란 관심사로 남아있었다. 그녀는 다양한 목관악기들 혹은 현악기들과 피아노가 조합된 작품들을 작곡했으며, 이와 같은 작품들에는 2곡의 piano quintets Opp.30 & 31, 훗날 piano quintet으로 편곡되었던 sextet for piano and winds Op.40, 그리고 두곡의 피아노 트리오piano trios Opp.33 & 34, nonet for winds and strings Op.38, trio for clarinet (or violin), cello and piano Op.44, trio for flute (or violin), cello and piano Op.45, 또 다양한 악기들을 위한 소나타가 포함되어있다.
실내악과 솔로 피아노를 위한 작품에 더하여, 그녀는 두곡의 서곡과 3곡의 교향곡을 작곡했다. 그녀의 3번 째 교향곡이 1849년 Societe des concerts du Conservatoire 에서 초연되었을 때 커다란 찬사가 뒤따랐다. 그녀의 작품군 중 확현하게 실종된 듯한 분야가 오페라 인데, 기실 그녀는 이 분애에 흥미와 야망을 가져왔으나 이러한 분야에 대한 그녀의 능력이 검증되어있지 않다는 이유로 Theatre de l'Opera 혹은 the Theatre de l'Opera-Comique로 부터 대본을 배정받지 못했다고 한다.
Piano Trio No. 1, Op. 33, in E Flat Major은 본 음반에 맨 첫 머리에 수록된 작품으로 violin, cello 그리고 piano를 위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부산스러운 느낌을 주는 알레그로와 고요한 Adagio molto, 역동적인 스케르초, 다소 일반적이지 않은 피날레의 tarantella 등 모두 4개의 악장으로 구성되어있다. 이 작품에는 능숙란 대위적인 기법과 비르투오식한 피아노적인 특징, 고양된 정신이 전 작품을 관통하고있다. 작품의 사운드는 외형적으로 동시대의 작곡가엿던 멘델스존을 연상케 하는 측면이있지만, 속박되어있지 않은 분위기를 보이고있다는 측면에서는 슈만을 연상케하는 점도 있다. 이 작품은 의심할 여지 없이 피아노 파트가 다른 악기 파트에 비하여 중심에 놓여지도록 된 것이며, 이는 그녀 자신이 이 작품을 개인적으로 이용할 목적으로 작곡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그리 놀랄만한 것도 아니다. 이 작품은 출판되지 않은 채 19세기 중반 파리의 인기있던 사설 콘서트를 통해 빈번하게 연주되었다.
Sextet for piano and wind quintet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파리 음악원에서 배웠던 그녀의 스승이자 당시 목관 앙상블을 위한 음악의 대가였던 라이하에 대한 양향이 반영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실질적으로 오케스트라 대신 목관악기 파트가 부가된 피아노 협주곡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협주곡의 전형적인 3악장 구조를 하고있는 것 역시 인상적이다. 첫 악장은 12분여의 길이로 남은 두 악장을 합한 것과 맞먹으며, 현란한 피아노를 매개로 숭고한 정신들에 의해 축조된 거대한 건축물을 보는 듯하다. Andante sostenuto 악장은 개개의 목관 악기들에 코드랄한 반주가 더해진 솔로 작품같은 인상을 주는 악장으로 이 악장의 피아노 파트는 벨리니나 쇼팽을 연상시키는 칸틸레나를 갖고있으며, 아름다운 선율적인 아이디어가 풍성하게 담겨있다. 찬란한 피날레는 유쾌한 분위기를 드러내는 피아노의 연주가 빛을 발하는 악장으로 종종 상성부의 두개의 목관 악기가 피아노 파트를 모방하기도 한다.
The Piano Trio No. 3, Op. 44, in E Flat Major는 clarinet, cello 그리고 piano를 위한 작품으로 1850년대 후반에 쓰여진 것이다. 이 작품은 종종 클라리넷을 대신하여 플룻이 가세하기도 하며, 4개 악장에 총 22분여되는 작품이다. 1번 트리오에서 바이올린이 수행했던 것보다 본 트리오에서의 클라리넷의 역할은 더욱 강조되어있으며, 이는 분명하고 명확한 음색을 갖고있는 악기임을 고려할 때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작품은 일견 동일한 악기 구성으로 되어있는 Mozart의 'Kegelstatt' Trio를 연상시키는 측면을 갖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