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Sergei Sergeyevich Prokofiev)
2021.12.26 11:03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Sergei Sergeyevich Prokofiev
전통과 혁신의 가교 역할을 한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는 1891년 우크라이나 손초프카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아 13살 때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들어갔지만 음악원의 보수적이고 아카데믹한 교육 방식에 적응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당시 작곡과 교수는 리아도프와 림스키―코르사코프, 글라주노프였는데,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이들은 러시아에서 가장 앞서 가는 음악가였다. 하지만 20세기로 들어서면서 이들의 음악은 옛 것이 되고 말았다.
어린 시절 이미 전통 화성법을 벗어난 다양한 실험을 했던 프로코피예프는 음악원의 보수적인 환경에 답답함을 느꼈다.
1908년, 프로코피예프는 전위적인 음악가들의 모임인 '현대음악의 밤'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모임은 그에게 숨통이 트이는 해방감을 안겨 주었다. 여기서 당시 전위적이라고 여기던 쇤베르크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스트라빈스키의 작품이 연주되었고, 프로코피예프 역시 이 모임을 통해 〈악마의 암시(Suggestion diabolique Op.4―4)〉를 비롯한 자신의 작품을 발표했다.
1909년, 음악원 작곡과를 졸업한 프로코피예프는 에시포바의 피아노 클래스로 들어가 피아니스트로서 필요한 공부를 계속했다. 작곡에도 힘을 기울여 1911년에 관현악곡 〈꿈(Symphonic tableau 'Dream' Op.6)〉과 〈가을 스케치(Symphonic sketch 'Autumn' Op.8)〉를, 1912년에는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을 발표했다.
1914년, 프로코피예프는 피아노과 수석 졸업생에게 주는 루빈스타인 상을 받고 피아노과를 졸업했다. 졸업 기념으로 여행을 떠난 그는 영국 런던에서 디아길레프를 만났으며, 그로부터 발레음악 작곡을 의뢰받았다. 러시아로 돌아온 그는 고로데츠스키의 대본을 바탕으로 〈알라와 롤리(Ala i Lolli)〉라는 발레곡을 작곡했다. 그런데 디아길레프는 〈알라와 롤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 작품을 공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디아길레프와 계약을 맺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그는 일약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전까지 적대적이었던 사람들이 그에게 앞다투어 연주회를 제안할 정도였다. 1915년에 스크랴빈이 세상을 떠나고, 스트라빈스키마저 서방으로 가버린 후, 러시아에 남은 진취적인 작곡가는 프로코피예프뿐이었다. 이 시기에 〈교향곡 1번 '고전'(Symphony No.1 in D major Op.25 'Classical')〉, 〈피아노 협주곡 제3번〉,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오페라 〈도박사(The Gamblers)〉를 작곡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에 이은 1918년의 독일 침공으로 러시아가 혼란에 빠졌다. 프로코피예프는 혼란을 피해 미국으로 갔다가 1920년에 유럽으로 이주했다. 그 이후의 시기는 그에게 성공과 실패, 방황과 확신이 교차하는 시기였다. 그는 유럽에 살면서도 늘 러시아로 돌아갈 날을 꿈꾸었다. 그러던 차에 디아길레프가 소련의 산업화를 찬양하는 작품 〈강철의 걸음걸이(Le Pas d'Acier Op.41)〉의 작곡을 의뢰했다. 1927년 2월, 공연에 앞서 소련을 방문한 그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소련 예술계에서 프롤레타리아 지지파가 승리하면서 그의 음악이 설 자리가 없게 되었다.
1932년 4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의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파의 독주에 제동이 걸렸다. 이와 더불어 프로코피예프가 소련에서 작곡가로 활동할 수 있는 가능성도 높아졌다. 그 후 영화음악 〈키제 중위(Lieutenant Kije)〉를 맡은 것을 계기로 소련과 유럽, 미국을 오가며 작곡과 연주 활동을 병행하던 그는 1935년, 가족과 함께 소련으로 영구 귀국했다. 스탈린의 무자비한 숙청이 시작된 바로 그해였다.
이듬해인 1936년,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이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오랫동안 외국에서 살았던 프로코피에프는 처음에는 이런 상황이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다. 소련으로 돌아오면서 그는 고국이 자신의 작품 활동을 보장해 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외국으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단 두 차례만 여행 허가를 받았을 뿐, 죽을 때까지 소련을 벗어나지 못했다. 소련 내에서의 작품 활동도 원활하지 않았다. 그동안 몸에 밴 그의 서유럽적 사고방식과 감수성이 예술을 체제 선전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소련 당국의 예술 정책과 충돌했다.
그래도 1948년 이른바 즈다노프 비판이 있기 전까지는 그럭저럭 잘 지냈다. 귀국 후 자신의 대표작인 〈피터와 늑대(Peter and the Wolf Op.67)〉와 10월 혁명 20주년 기념 〈막스, 레닌, 스탈린의 글에 붙인 칸타타〉를 작곡했으며, 1938년에는 에이젠슈타인의 영화 〈알렉산더 네프스키(Alexander Nevsky Op.78)〉의 음악을 맡기도 했다. 1945년에는 발레 〈신데렐라(Cinderella)〉를 볼쇼이 극장에서 공연했고, 1946년에는 〈교향곡 제5번(Symphony No. 5 in B flat major Op.100)〉으로 스탈린 상을 수상했다.
프로코피예프가 음악을 맡은 영화 〈알렉산더 네프스키〉의 한 장면
하지만 1948년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프로코피예프와 쇼스타코비치, 하차투리안, 미야코프스키를 인민의 삶과는 동떨어진 작품을 쓰는 형식주의자로 낙인찍었다. 그 후 프로코피예프는 거의 집에서 칩거하다시피하며 지냈다. 그러다가 1953년 3월 5일, 공교롭게도 스탈린과 같은 날에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프로코피예프의 작품은 크게 다섯 가지 경향으로 나뉜다. 먼저 고전주의 시대의 협주곡이나 소나타 형식을 따른 신고전주의적인 작품이다. 그는 모두 7개의 교향곡을 작곡했는데, 그중 제1번 '고전'이 이 분야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러시아 혁명 정국에서 프로코피예프가 자신의 진로를 놓고 한창 고민하던 1917년에 작곡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음악을 작곡하는 것이 마치 유행처럼 퍼져 있던 시기에 단순하고 명료한 고전주의 형식의 작품을 썼는데, 네 개의 악장 중 1악장은 '고전'이라는 제목에 가장 충실한 악장으로 마치 하이든 시대를 여행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두 번째 경향은 자신만의 화성 언어를 찾아 강렬한 감정을 표현한 현대적인 작품들이다. 피아노곡 〈환영〉, 〈악마의 제안〉, 〈풍자〉, 관현악 〈스키타이 모음곡〉, 오페라 〈도박사〉, 칸타타 〈일곱, 그들은 일곱〉, 〈교향곡 제2번〉이 이에 속한다.
또 하나는 토카타적인 작품이다. 그는 슈만의 〈토카타〉를 처음 듣고 강렬한 인상을 받아 자신의 〈토카타〉를 썼다. 〈연습곡〉과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의 〈스케르초〉, 〈피아노 협주곡 제5번〉의 〈토카타〉에 이런 경향이 반영되어 있다. 이 중 1913년 작인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은 당시로서는 시대를 앞서 가는 작품이었다. 제1악장의 중간에 즉흥곡풍의 멜로디가 나오는데, 이렇게 악장 중간에 즉흥곡풍의 독주부가 길게 이어지는 것은 다른 피아노 협주곡에서는 잘 볼 수 없는 것이다. 2악장은 숨 돌릴 틈도 없이 빠르게 진행되는 토카타풍의 악장이다. 처음부터 기세 좋게 튀어나오는 피아노에 현악기가 피치카토로 익살맞게 응대한다. 3악장은 간주곡, 4악장은 전체적으로 거칠고 힘찬 느낌을 주는 악장이다.
1936년 2월, 프로코피예프가 브뤼셀 오케스트라와 〈피아노 협주곡 제3번〉을 협연하는 장면을 그린 스케치
프로코피예프는 사색적이고 서정적인 곡도 자곡했다. 관현악곡 〈동화(Symphonic tableau 'Dream' Op.6)〉, 〈꿈(Symphonic tableau 'Dream' Op.6)〉, 〈가을〉, 〈바이올린 협주곡〉 1번과 2번, 발레음악 〈로미오와 줄리엣(Romeo and Juliet)〉, 〈신데렐라〉 등이 이에 속한다.
또 하나의 영역은 괴기스러운 것, 그로테스크한 것이다. 변덕스러움, 우스꽝스러움, 조롱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데, 프로코피예프가 시카고 오페라단의 위촉을 받아 1918년에 작곡한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 사랑(Love for Three Oranges)〉에 이런 경향이 자주 나온다.
우울증에 걸린 왕자를 위한 파티에 마법사가 나타나 왕자가 나중에 오렌지를 사랑하게 된다는 저주를 내린 후 오렌지를 찾아 나선 왕자가 오렌지 속에서 공주를 발견하고, 결국 궁궐로 돌아와 행복한 결혼식을 올린다는 것이 줄거리이다. 1막에서 신하들이 일정한 리듬과 음높이로 연주하는 관악기 반주에 맞추어 왕자의 병을 나열하며 부르는 합창, 왕자를 웃기기 위한 파티에서 처음 등장한 후 수시로 나오는 행진곡, 3막에서 왕자와 광대가 오렌지를 훔치러 가는 것을 보고 광대가 조롱하는 장면에서 연주되는 스케르초, 왕자와 공주가 결혼을 하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악마들이 도망치는 장면에서 연주하는 격렬하고 빠른 피날레에서 괴기스러운 익살과 조롱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