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관련 상식 - 19세기의 이탈리아 오페라
2012.12.12 16:32
19세기의 이탈리아 오페라 |
나름대로 재능이 있었어다고 하더라도, 롯시니 아류의 역할은 무시해도 상관이 없들 것이다. 그러한 인물로는 롯시니의 그늘에 숨어 있었던 카라파(1787-1872), 영국에 자리잡은 미켈레 코스타 Michele Costa(1808-84), 새로운 음악을 만들려고 애쓴 카를로 코차(1782-1873), 또 벨리니의 카풀레티가와 몬테키가와 오랫동안 겨룬 줄리에타와 로메오 Giulietta e Romeo(1825)를 쓴 니콜라 바카이 Nicola Vaccai가 있다.
조반니 파치니(1796-1867)도 롯시니의 영향을 크게 받은 사람이지만 꽤 새로운 어법을 썼다. 그러나 시류에 뒤떨어진 주제에 머물러 있었다(<베스타의 무녀 La Vestale>(1823) <사포 Saffo>(1840), <메데아 Medea>(1843)). 이에 반하여 사베리오 메르카단테(1795-1870)는 새시대에 보다 적합한 주제를 다루어 강한 개성을 나타냈다. 그의 빅토르 위고에 바탕을 둔 <맹세>(1837), 추방자의 테마를 다룬 <무뢰한 Il Bravo>(1839), 그리고 <섭정>(1843) 등은 빈첸초 벨리니(1801-35)나 가에타노 도니제티(1797-1848)의 귀족적인 낭만주의 작품보다 더욱 뚜렷하게 베르디를 예고하고 있다. 구성보다는 효과에 마음을 썼던 베르디는 여러 장면이나 아리아를 솜씨있게 이어 맞추는 것으로 만족했고, 형식을 상황에 맞게 처리한다. 1850년 이후에는 정치적인 것은 그만두고 사회적 혹은 인간적인 작품을 보여주었으며(<리골레토>(1851), <라 트라비아타>(1853)), 특히 <시몬 보카네그라>, <가면무도회>(1859), 그리고 <돈 카를로스>에서 우정이나 권력의 고독 같은 새로운 테마에 도전했다. 이들 3개의 오페라는 서법면에서도 새로운 탐구의 자취를 보여주고 노래가 이미 드라마의 존재 이유가 아니게 된 연극에 있어서 깊은 인간 심리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대규모의 중창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의 지위가 위태롭게 되었다고 느끼자 <아이다>(1871)를 써서 연소한 라이벌들을 손쉽게 물리쳤다. 이 작품에서는 화려한 장면과 노래를 위하여 이야기의 줄거리가 희생이 된 면이 없지 않다. 이어 80세가 가까워진 그는 젊은 스카필랴투라의 배신자 보이토의 잘 다듬어져 있으나 별로 기능적이 아닌 대본에 따라 다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다루었다. 서정적인 드라마 <오텔로>(1887)와 비아냥의 희극 <팔스타프>(1893)가 그것인데, 이들은 어느 것이나 신흥계급의 동경과는 무관한 고고한 걸작에 지나지 않게 된다. 반세기 동안이나 베르디가 잡고 있던 이 최고의 권리 때문에 페데리코 Federico 및 루이지 리치 Luigi Ricci의 뛰어난 희극 <크리스피노와 대모 Crispino e la comare>(1850)의 그림자가 희미해져 버렸다.
게다가 요네 Jone(1858)와 만초니에 의한 <약혼자들 Promessi sposi>(1869)을 쓴 에리코 페트렐라 Errico Petrella(1813-77), <뤼 블라스 Ruy Blas>(1869)에 의해서 한때 명성을 떨친 필리포 마르케티 Filippo Marchetti(1831-1902) 같은, 독창적이지는 않지만 탄력성 있는 재능의 소유자들도 눈에 띄지 않는 존재로 끝나 버리고 말았다. 얼마가 지나서야 보이토나 폰키엘리, 카탈라니 등에 의해서 참다운 베르디 이후가 시작되고 그 다음에 음악의 베리스모(진실주의)가 꽃피게 된다. |
요즘 다른 오페라보다 '안나 볼레나'가 굉장히 뜨는 분위기인데... 역시나 표절음악이 원본을 가리는 분위기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