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강의 요점을 정리하는 서양 음악사 - 2
2022.10.11 10:11
2. 중세 : 고대, 중세, 르네상스
1-3-1. 파리 양식의 다성 음악
12세기 파리(Paris)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Europe)의 중심지가 되었다. 노트르담 대성당(Cathédrale Notre-Dame)이 세워졌으며 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파리대학교를 건립했는데 이로 인해 교육과 지식의 중심지가 되었다. 레오냉(Léonin, fl. 1150s-?1201; 또한 Leoninus, Leonius, Leo)과 페로탱(Pérotin, 1150년경 혹은 1200년경)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남긴 다성 음악의 양식(Forms of polyphonic music)을 파리 양식(Parisian style), 노트르담 양식(Notre Dame Form)이라고 한다.
레오냉(Léonin)은 2성부 오르가눔을 작곡했다. 응답식 성가의 독창 부분만을 다성 음악으로 도입했으며 합창 부분은 원래의 단성 그대로 두었다. 순수 오르가눔, 디스칸투스(discantus), 클라우줄라(Gradual; 디스칸투스 양식으로 쓰인 부분인 층계송) 등이 포함된다.
페로탱(Pérotin)은 레오냉의 후계자로 “클라우줄라”(Gradual)만 따로 작곡했으며 3성부와 4성부를 위한 오르가눔(organum)을 작곡했다. 1150경부터 그가 소속된 프랑스 리모주의 생마르티알 수도원(Saint-Martiel Abbey of Limoges)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오르가눔이 사용되었다. 2성부는 두플룸(Duplum; 상위[윗]성부 : 두플룸, 성사 선율이 있는 성부 : 테노르), 3성부는 트리플룸(Tripleplum), 4성부는 콰드라플룸(quadraplum)이라고 한다.
2성부는 단성 성가가 실린 ‘테노르’(Tenor) 성부 위의 성부(두플룸 성부)에서 유려한 멜리스마(Melisma) 선율이 움직이는 형태이다. 이 새로운 오르가눔은 한 음절 위에 여러 음이 붙기 때문에 “멜리스마 오르가눔”(Melisma organum)이라고도 했다. 대개 콘둑투스(conductus)는 라틴어로 쓴 시를 사용해 2성부와 3성부로 작곡한 것으로, 이는 비전례적인 종교 음악(Non- Unusual Religious Music)으로 지금까지의 다성 음악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오르가눔의 테노르 성부를 이루던 성가 성부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새로이 작곡된 테노르가 사용되었는데, 이로 인해 콘둑투스를 완전히 작곡된 최초의 음악이라고도 한다. 각 성부간의 리듬 진행이 비슷한 음가들로 되어 있어서 오르가눔에 비하면 전 성부가 거의 같은 리듬으로 전개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대체로 단음적인 양식을 주로 사용하며 여러 절을 갖는 유절 형식(Strophic form)으로 되어 있다.
13세기 후반부터는 파리 양식 오르가눔과 콘둑투스는 점차적으로 사라지고 새로운 양식인 모테트(motet)가 크게 유행하는데, 모테트라는 장르는 오르가눔의 클라우줄라(층계송)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초기에는 가사가 없는 클라우줄라의 윗 성부에 라틴어 가사를 붙이는 것이었으며, 이는 트로푸스(tropus)와 같은 방식으로 기존의 음악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클라우줄라에 가사를 붙이는 것이 모테트로 불리어지기 시작한 것 같다. 초기의 가사 내용은 어느 정도 종교적이었으나 곧 작곡가들은 테노르의 내용과는 전혀 관계없는 라틴어 가사나 세속적인 프랑스어 가사를 붙이기 시작했다. 이때 테노르 성부는 주로 기악으로 연주되게 된다.
그레고리오 성가(Gregorian chant)에서 빌려온 테노르만 그대로 유지하고 완전히 새로운 선율과 가사로 상위 두 성부를 작곡하게 되는데 13세기 중반에 모테트는 어느 정도 틀을 갖추게 된다. 각각 내용은 연관이 있지만 다른 가사를 부르고 프랑스어나 라틴어 두 언어를 함께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시기에는 다소 음악을 복잡하게 만들었는데 이 복잡성을 중세 상류층이 즐겼던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고급 교육을 받은 소수의 사람들로, 이들의 음악은 청중을 위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본인들이 직접 노래를 부르며 즐기는 경향을 보였다.
13세기 말에 모테트(motet)의 기본 틀은 유지되었지만 음악적인 내용은 리듬의 변화로 인해 큰 차이를 보이게 되었다. 작곡가들은 상위 두 성부의 리듬 진행에 있어서 분명한 대조를 주게 되는데, 이는 단순하고 규칙적인 리듬 형식 대신에 보다 자유로운 리듬을 사용하면서 가능해졌다. 이러한 모테트 형식을 프랑코식의 모테트(Franconian; Franconian motets)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13세기 후반에 활동한 쾰른[콜로뉴]의 프랑코(Franco of Cologne, fl. 1250-1280)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세 성부의 리듬이 모두 다르며 트리플룸 성부가 가장 빠르고 모테투스는 조금 빠르며 테노르 성부는 가장 느리다. 트리플룸 성부는 느리게 움직이는 성부들에 비해 훨씬 긴 가사를 갖는다.
이러한 프랑코식의 모테트 양식(Franconian motet style)의 발달은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기보법(notation)을 필요로 하게 되는데 여기에 큰 기여를 한 사람이 쾰른의 프랑코(Franco of Cologne)이다. 그의 기보법(Franco notation)은 6개의 리듬 형식에서 발전한 것이며, 이것은 기본적으로 리듬의 분할을 3분법으로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개개의 음표에 고정된 음가를 지정하였는데 이것은 특정한 음표는 특정한 음 길이를 나타낸다는 현재의 기보법과 상당히 가까워졌음을 의미한다.
두플렉스 롱가(Duplex longa), 롱가(Longa), 브레비스(Brevis), 세미브레이스(Semibrevis) 순으로 박자가 길며 두플렉스 롱가를 제외하고 모두 3분법이 기준이다. 다성 음악의 출현으로 기보법의 발달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14세기에 들어서도 계속 이어졌다. 첫째, 레오냉과 페로탱의 장대하고 화려한 오르가눔 음악에서 작고 소박한 음악인 콘둑투스와 모테트(motet)로의 이행하였으며, 둘째는 오르가눔이 지니던 종교적 배경이 점차적으로 클라우줄라와 모테트를 거치면서 세속적으로 변화를 추구하게 되었고, 셋째로는 종교적인 음악에서 세속적인 음악에로의 변천은 음악 연주 장소가 대성당에서 궁정의 작은 방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반영한다. 세속 음악(Secular music)은 전례 음악(Liturgical music)에 포함되지 않는 모든 음악을 일컫는데, 내용은 종교적이면서도 종교 의식에서 불리어지지 않은 음악들도 여기에 포함된다. 또한 모테트처럼 처음에는 전례의 한 부분이었는데 후에 전례와 상관없는 부분으로 변화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서양의 성악 세속 음악(Vocals Secular Music)은 비교적 지위가 높은 귀족들이였으며 기악 세속 음악(Instrumental Secular music)은 전부가 춤곡으로 평민과 귀족들 모두가 즐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러 형식의 다성부 음악이 발달하던 12~13세기를 부르는 특별한 명칭은 없었다. 그런데 14세기에 프랑스의 주교이자 음악가인 필리프 드 비트리(Phillippe de Vitry, 1291-1361)가 자기 시대의 음악을 “새로운 기법(또는 예술)”이라는 뜻의 아르스 노바(Ars nova)라고 부르면서 그 이전을 “옛 기법(예술)”이라는 뜻의 아르스 안티콰(Ars antiqua)라고 부르게 됐다. 아르스 안티콰 시대에 처음으로 작곡가들이 나타났다. 여성 음악가에서 언급한 성녀 힐데가르트 폰 빙엔(Saint Hildegard Von Bingen, 1098-1179)와 레오냉, 페로탱 등이다. 이들의 곡은 악보 덕분에 오늘날까지도 전해지고, 음반 녹음도 많이 되어 있어 고음악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시대에 역사상 합창곡으로서의 첫 미사곡이 나타난다. 작곡자는 전해지지 않지만 발견된 지방 이름을 따서 “뚜르내 미사곡”(Missa Tournai)이라고 부른다.
아르스 노바 시대의 특징이라면 차차 선율이 인간성을 띠고 사랑스러워졌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당시까지 선율은 교회 선법(Church Preaching)을 따른 것이어서 때로 딱딱하고 부드럽지 못한 부분들이 있었으나, 이때부터는 필요한 곳에 반음(semitone)을 사용해 선율을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완전 음정(Full pitch)인 4도나 5도, 혹은 옥타브(octave)의 진행이 사라지고, 요즘과 같이 3도와 6도의 화음이 도입되었으며, 가사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선율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드리갈(Madrigal)과 목가(pastoral song), 발라드(Ballade), 카치아(caccia) 등으로 불리는 세속 음악이 크게 발전했다. 또한 아르스 노바 시대에는 작곡 기법이라고 특별히 새로 발견된 것은 없다. 다만 이전 시대의 모테트 작곡 기법이 활발하게 사용되고 발전하면서 전례 합창곡으로서 미사곡(Missa)과 모테트(Motet)가 더욱 발전했다.
미사곡(Missa)이란 미사 통상문(Ordina rium Missae) 가운데서 자비송(Kyrie)과 대영광송(Gloria), 신경(Credo), 거룩하시도다(Sanctus), 하느님의 어린 양(Agnus Dei)뿐만 아니라 미사 고유 기도문(Proprium Missae)인 입당송과 화답송, 봉헌송, 영성체송 등을 음악으로 만든 것을 말한다. 모테트(Motet)란 이제 뜻이 바뀌어 미사의 기도문이 아닌 기도문, 특히 시간 전례(성무일도)의 후렴구나 찬미가 또는 시편 등을 가사로 대체해 대위법적(Counterpoint)으로 작곡한 합창곡을 뜻했다.
이 시대 작곡가로는 프랑스의 기욤 드 마쇼(Guillaume de Machaut, 1284-1377), 이탈리아의 프란체스코 란디니(Francesco Landini, 1325-1397)와 야코포 다 볼로냐(Jacopo da Bologna, fl. c. 1340-1386), 조반니 다 카쉬아(Giovanni da Cascia, 1436-1476), 게라델로 다 피렌체(Ghirardello de Firenze, 1320-1362)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이 작곡한 수백 곡이 악보 덕분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데, 그 가운데 기욤 드 마쇼(Guillaume de Machaut)의 〈성모 미사곡(Missa de Notre Dame)〉은 단연 일품으로 꼽힌다. 기욤 드 마쇼(Guillaume de Machaut)의 미사곡은 음악사에서 두 번째 미사곡이며, 작곡자가 알려진 첫 번째 미사곡이었다(이 부분은 중세와 르네상스 전환기가 겹치는 부분이라 다음 기회에 다시 논하기로 한다. 이 시기부터 음악사의 중심은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로 급격히 이동하기 시작한다. 조반니 다 카쉬아(Giovanni da Cascia, 1436-1476), 게라델로 다 피렌체(Ghirardello de Firenze, 1320-1362)에 대한 간략한 소개도 포함될 것이다).
1-3-2. 단성 노래-라틴어 노래
초기 세속 음악(Secular music)은 그레고리오 성가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성부만으로 된 라틴어를 사용한 음악이었다. 전례 음악(Liturgical music)과 유사한 양식의 이 라틴어 노래들에는 콘둑투스(Conductus)가 있었는데 당시의 콘둑투스는 단 선율로 되며 종교 의식에도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후에는 비전례적인 노래를 지칭하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콘둑투스(Conductus)와는 달리 처음부터 세속 노래로 출발한 음악 중에 골리아드의 노래(Song of golliad)라는 것이 있는데, 떠돌이 학자들의 생활과 세계관이 그려져 있는 노래들을 말한다. 12세기부터 유럽의 각 지방은 라틴어 문화권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했는데, 그 지역의 지방언어(방언)를 중요시 여기게 되었고 지방어로 쓴 문학 작품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11세기 말부터 남부 프랑스의 세속 노래를 만들었던 시인이자 작곡가인 사람들을 트루바두르(Troubadour)라고 하는데 이들은 봉건 영주와 함께 지내며 교육 받은 사람들로 귀족 출신도 있었으며 평민 출신이라고 해도 높은 교양을 지닌 경우가 많았다. 이들이 남긴 시는 캉소(canso; 칸조 : 궁정의 사랑=정신적인 사랑, 남성 시인이 고귀한 귀부인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을 노래함), 파스토렐라(Pastorella; 높은 지위의 기사인 남자 주인공과 시골 목장의 양치기 처녀), 알바(Alba; 사랑하는 연인이 밤을 지새우는 동안 망을 보는 사람이 하는 노래)가 대표적이다.
트루베르(trouvere)는 북부 프랑스에서 작사와 작곡을 하던 사람들인데, 12세기 말에 두드러진 활약을 했고 13세기 말까지 지속되었으나 다성 세속 노래의 발달로 14세기에 점차 사라졌다. 트루바두르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북부 프랑스인들만의 새로운 유형을 첨가시켰는데 사랑 노래(칸조)와 파스투렐르(파스토렐라), 이야기 노래(여인이 사랑하는 연인이 멀리 떨어져 있음을 한탄함)가 있다. 트루바두르의 작품들보다는 선율의 진행이 단순하고 반복되는 부분이 많으며 후렴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반복을 통한 단순함을 추구하였고 시의 형식과 음악의 형식이 정형화되었다. 여기서 정형시 형식이 나오게 되었다. 독일 지방에서는 민네(장)징어(Minnesänger)가 있었는데, 사랑이 주된 소재를 이루지만 종교적인 심각성이 가미되었다.
단성 노래의 연주는 적절한 악기를 사용하여 반주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리듬 해석이 큰 논란이 있는데, 중세의 단성 음악은 음 높이만 표기했지 음 길이의 길고 짧음은 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트루베르의 음악은 트루바두르의 음악보다 3박자 리듬에 더 잘 맞으며 민네(장)징어의 노래들은 항상 악센트가 3박자로 되어 있다. 기악 음악을 악보로 남기지 않았던 이유는 즉흥 연주가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종교계의 기악 음악에 대해 가졌던 멸시와 경계심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악 음악은 세속 음악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가장 오래된 음악은 역시 춤음악이다. 에스탕피(estampida)는 반복이 많고 트리스탄의 탄식(Tristan's sigh)은 2개의 춤곡이 한 쌍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에스탕피(estampida) :
에스탕피는 12~14세기의 궁중 무용 음악으로 중세 음유시인들의 시에 이 춤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쌍을 이룬 남녀가 비엘(Vielle; 중세의 궁현악기로 비올과 바이올린의 전신. 독일어로는 피델(Fiedel)이라고 한다)의 반주에 맞추어 미끄러지는 듯한 스텝을 밟으며 추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에스탕피라는 음악 형식은 중세의 라틴어 찬송가 양식인 속창에서 비롯되었다. 이 음악에는 속창과 마찬가지로 일련의 반복 악구(aa, bb, cc,……)가 있으며, 마지막 반복 악구는 보통 변형된다. 에스탕피는 지금까지 악보가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기악의 하나이다. 유명한 음유시인의 노래 〈칼렌다 마야 Kalenda maya〉(랭보 드 바케라스(Raimbaut de Vaqueiras, c. 1150-1207)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는 기존의 에스탕피에 시를 붙인 것이다. 에스탕피가 13세기의 춤인 ‘스탕티페’(stantipes)와 같은 것인지 아니면 단지 관련이 있을 뿐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콜로뉴(쾰른)의 프랑코
프랑코식의 기보법
글 출처 : 음악사가 있는 고전음악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