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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3년 12월, 이태리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은 현임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의 뒤를 이을 차기 음악감독으로 리카르도 샤이를 내정했다고 발표했다. 리카르도 샤이는 과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 직무를 16년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현재는 독일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있는 이 시대의 가장 탁월한 지휘자이다.

이번 발표를 통해서 샤이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빅토르 데 사바타,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클라우디오 아바도, 리카르도 무티를 계승하는 ‘이태리 대표 거장’의 지위를 당당히 공인받았다고 볼 수 있겠다. 작년에 지휘자로서는 본격적인 원숙미를 펼치기 시작하는 나이라는 예순을 넘기면서 앞으로의 활약이 더욱 기대되는 이 쾌활하면서도 진지하고 비범한 거장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아보도록 하자.

리카르도 샤이는 1953년 2월 20일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힌데미트(Hindemith)를 사사한 작곡가이자 나중에 스칼라 극장의 매니저를 지내기도 한 루치아노 샤이였고, 그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작곡의 기초를 체계적으로 지도 받으며 자라났다. 어린 샤이는 일찌감치 음악적 재능을 드러냈고, 페루자, 로마, 밀라노의 음악원에서 수업을 쌓았다. 또 시에나에서 저명한 프랑코 페라라의 지휘 마스터 클래스를 수료하기도 했다.

샤이의 지휘자 데뷔는 무척 이른 14세 때 성사되었다. 세계적인 명성의 체임버 오케스트라인 ‘이 솔리스티 베네티(I Solisti Veneti)’를 지휘하여 이탈리아 바로크,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3번], 힌데미트의 [추도의 음악] 등을 연주했던 것. 17세 때는 밀라노에서 첫 음악회를 열었고, 2년 뒤에는 밀라노의 누오보 극장에서 마스네의 오페라 [베르테르]를 지휘했다. 그리고 이 때 그를 눈여겨 본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에 의해서 샤이는 스칼라 극장의 부지휘자로 발탁되었다.

아바도 밑에서 수련을 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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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우디오 아바도(1933 – 2014)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야말로 샤이의 음악관과 경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이었다. 샤이는 아바도의 조수 생활을 하면서 오페라 공연과 극장에 관한 제반 지식과 경험을 습득했고, 나아가 콘서트 활동을 중시했던 아바도의 영향으로 교향곡과 현대음악에 관한 지식과 경험도 체계적으로 쌓을 수 있었다. 또 그 시절 영국 지휘자 존 바비롤리의 말러 교향곡 리허설을 참관한 것도 기억해둘 만한 일이다.

22세 때 샤이는 시카고 리릭 오페라에서 푸치니의 [나비부인]을 지휘함으로써 미국에 진출했다. 미국에서의 활동은 시카고에서의 [리골레토]와 샌프란시스코에서의 [투란도트] 무대로 이어졌다. 그리고 1978년, 25세의 샤이는 마침내 베르디의 초기 오페라 [군도]를 지휘하여 대망의 스칼라 극장에 데뷔했다. 런던의 로열 오페라하우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빈과 뮌헨의 국립 오페라도 그를 원했고, 바야흐로 샤이는 거침없는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콘서트 지휘자로 변신하다

1980년대 초반, 샤이는 유럽 본토와 영국, 미국을 오가며 빠르게 입지를 다져 나갔다. 특히 1981년에는 영국의 데카 레이블과 계약을 맺고 로시니 서곡집 등의 음반을 내기 시작했다. 1983년에는 빈 필하모닉을 지휘한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 음반으로 화제를 모았고, 1984년에 내놓은 오르프 [카르미나 부라나]는 타임지에 의해서 그 해의 ‘최고 음반’에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다.

[카르미나 부라나] 음반은 독일 서베를린의 방송교향악단(RSO 베를린)을 지휘한 것이었다. 샤이는 1982년, 로린 마젤 퇴임 후 7년 동안 공석이었던 이 악단의 상임지휘자로 부임했고, 이후 7년간 ‘긴장감 넘치는 몸가짐, 표현력 풍부하면서 강력한 신호, 기운을 북돋우는 몸짓’으로 단원들을 이끌었다. 베를린에서 샤이는 ‘콘서트 지휘자’로서 본격적인 날개를 펼치기 시작했고, 브루크너와 말러를 비롯한 후기 낭만 음악, 그리고 너무 급진적이지 않은 현대음악 등을 선보이며 청중과 평단의 호평과 신뢰를 받았다. 그중에서도 1990년에 발매된 쇤베르크의 대작 [구레의 노래] 음반은 샤이와 RSO 베를린의 파트너십이 일구어낸 최고의 성과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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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카르도 샤이(우)와 부친 루치아노 샤이(좌)

암스테르담, 첫 번째 황금기

1988년, 샤이는 베르나르드 하이팅크(Bernard Haitink)의 후임으로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의 제5대 상임지휘자에 취임한다. 그는 이 악단 최초의 비 네덜란드계 상임지휘자라는 기록을 세웠고, 그 해 악단은 창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네덜란드 왕실로부터 ‘로열 콘세르트허바우’라는 새로운 이름을 하사받아 사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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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카르도 샤이(좌)와 이탈리아 지휘자 프랑코 페라라(우)

샤이는 스스로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한 이 유서 깊은 악단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단원들은 ‘마치 발레 무용수를 보는 듯한’ 그의 리드미컬하고 쾌활한 몸짓과 명확하고 알기 쉬운 비팅에 매료되었고, 처음에는 ‘깊이가 좀 부족한 게 아닌가?’ 했던 일부 단원들의 의심도 이내 잦아들었다. 그 결과 샤이와 악단은 놀라운 시너지 작용을 일으켰는데, 콘세르트허바우는 ‘영원한 2인자’의 이미지를 벗고 최정상급 앙상블로 도약했고, 샤이 역시 정상급 지휘자로 발돋움했던 것이다.

사실 이런 성과는 처음부터 예견되었다. 1988년 11월 3일에 열린 취임 기념 음악회에서 샤이는 베르디의 [레퀴엠]을 지휘했는데, 빈의 한 신문에 이런 평이 실렸다. “어제부터 ‘어느 오케스트라가 세계 최고인가?’ 라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인가, 아니면 빈 필하모닉인가, 아니다! 암스테르담의 로열 콘세르트허바우가 세계 최고이다.”


암스테르담에서 샤이는 첫 번째 황금기를 구가했다. 보수적인 청중들을 대상으로 현대음악 프로그램을 과감하고 끈기 있게 선보여 결국 성공을 거두었고, 야외 음악회를 통해서 일반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서려는 시도도 큰 호응을 얻었다. 또 오페라 지휘자로서의 역량도 충분히 발휘했는데, 네덜란드 오페라에 정기적으로 출연하여 베르디와 푸치니를 탁월하게 지휘했는가 하면, 콘세르트허바우(공연장)에서의 크리스마스 마티네 공연의 프로그램도 이태리 오페라로 장식하곤 했다.

무엇보다 베를린에서 시작했던 브루크너와 말러 사이클을 완결 지은 것이야말로 가장 빛나는 업적이다. 특히 말러의 교향곡들을 지휘하면서, 샤이는 공연장의 풍윤한 어쿠스틱(음향 조건)과 악단의 유려한 사운드를 십분 활용하여 감미로운 칸타빌레와 탐미적인 음향으로 가득한 눈부신 연주들을 선보였다. 동시에 악단의 기능적인 우수성과 훌륭한 음악성까지 유감없이 드러낸 이 연주들은 출중한 녹음 기술로 음반에 수록되어 지금까지 말러 교향곡의 스테디셀러로 각광받고 있다.

라이프치히, 제2의 황금기

그러던 2002년, 리카르도 샤이는 뜻밖에 콘세르트허바우를 떠나겠다고 선언한다. 모두의 예상을 뒤엎은 발표였기에 많은 이들이 그 이유를 궁금해했다. ‘박수칠 때 떠라나’는 격언을 새긴 결과였을까? 아니면 만족스러운 수확을 뒤로하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려 했던 것일까? 여하튼 2004년 6월, 베아트릭스 여왕이 지켜보는 가운데 말러 [교향곡 9번]으로 고별 콘서트를 치른 샤이는 16년 동안 정든 콘세르트허바우를 떠났다.

샤이의 새로운 임지는 독일 동부의 라이프치히. 그곳에는 ‘세계 최초의 민간 오케스트라’로 유명한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기원이 1743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는 빈 필에 필적할 만한 역사적 권위를 자랑하는 독일 굴지의 앙상블이다. 특히 과거 구동독에 속해 있었던 까닭에 독일 악단 고유의 전통과 개성을 훌륭히 보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장점인 동시에 약점이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그 개성을 존중하고 아꼈지만, 또 많은 이들이 그것을 고리타분한 것으로 여기기도 했다. 다시 말해서 얼마간 보완과 개선의 손길이 필요한 골동품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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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하는 리카르도 샤이

샤이와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인연은 198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카라얀의 주선으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처음 만난 이들은 함께 R. 슈트라우스의 [돈 후안]과 슈만의 [교향곡 4번] 등을 연주한 바 있다. 그것은 샤이에게 ‘음악적·정서적으로 대단한 경험’으로 각인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때의 강렬한 인상, 그리고 2001년에 이루어진 15년 만의 객원지휘(차이콥스키 5번 등)가 샤이를 라이프치히로 이끈 이유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2005년 9월, 리카르도 샤이는 게반트하우스의 열아홉 번째 카펠마이스터(상임지휘자)로 취임하여 멘델스존의 [한여름 밤의 꿈 서곡]과 [교향곡 2번 ‘찬가’] 등으로 첫 시즌을 열었다. 그리고 그의 손길은 독일 음악의 메인 스트림을 차근차근, 더욱 심도 있게 섭렵하기 시작했다. 멘델스존, 슈만, 바흐, 베토벤, 브람스, 그리고 다시 한 번 말러. 아울러 그는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사뭇 익숙하면서도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시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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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연주하는 리카르도 샤이

샤이는 동부 독일 악단 특유의 배치와 게반트하우스(공연장) 특유의 어쿠스틱 등에 기인한 이 악단의 앙상블과 사운드에 대해서 이런 언급을 한 적이 있다. “풍성한 배음과 전체 음향에 은은하게 살짝 입혀진 어두운 터치, 오케스트라의 전반적인 색채와 특징을 실제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현악기이다. … 나는 이 앙상블이 빚어내는 음악적인 질서와 규칙, 그리고 투명한 음향을 정말로 사랑한다.” 그리고 그는 그것에 신선한 생기와 활력, 밝고 선명한 색채를 더했다. 그 결과 악단은 과거 쿠르트 마주어 시절에 비해 한층 쾌적하고 생동감 넘치며 색채감 풍부한 앙상블로 변모해갔다.

샤이는 게반트하우스에서도 꾸준히 음반을 발표해왔다. 다만 이번에는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어 영상물 쪽에도 무게가 실렸다. 그중에서 2005년의 취임 기념공연 실황과 2006년의 슈만 서거 150주년 기념공연 실황은 지휘자와 악단이 초기부터 탄탄한 파트너십을 맺고 있었음을 증언하는 명공연이다. 음반들 중에서는 ‘멘델스존 디스커버리’와 슈만 교향곡의 말러 편곡판을 연주한 전집, 그리고 근래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 등이 돋보인다. 그러나 이들의 대표작이라면 최근 영상물로 속속 발매되고 있는 ‘말러 사이클’을 꼽아야 할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가장 최근에 나온 ‘말러 4번’과 ‘말러 6번’은 괄목할 만한 연주 수준과 탁월한 음악성으로 샤이와 게반트하우스 콤비의 파트너십이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샤이와 게반트하우스의 계약은 2020년까지 연장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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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콘서트홀 외관. 2011년. Ⓒ황장원

스칼라에서 펼쳐질 새로운 황금기

이제 샤이는 라이프치히에서의 업적에 더하여 고향인 밀라노에서 또 다른 업적을 쌓아 나갈 참이다. 그의 경력이 오페라 극장에서 시작된 점과, 그동안 지휘한 오페라 무대들(스칼라를 포함하여)에서 그가 일구어온 뛰어난 성과들을 감안한다면, 그가 스칼라 극장의 보직을 수락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성공이 내다보이는 행보라 할 수 있겠다. 다만 유별나기로 악명 높은 밀라노의 청중, 아바도나 무티와도 불화를 빚었던 스칼라의 경영진과 강성 노조 등이 복병이기는 하지만, 지금 당장은 화창한 하늘만이 펼쳐질 듯한 분위기이다.

어쩌면 스칼라는 샤이에게 못다 이룬 꿈의 성취라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사실 그는 게반트하우스에 부임할 당시 라이프치히 오페라의 음악감독도 겸임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독일의 지방극장’으로 안주하려는 극장의 경영진 및 시 당국과 마찰을 빚으면서 2008년에 그 자리를 내려놓은 바 있다. 그가 암스테르담을 떠나 라이프치히로 향했던 이유 중 하나가 콘서트와 오페라를 동시에 지휘할 수 있는 입지조건이었음을 상기하면 그로서는 진한 아쉬움이 남는 선택이었으리라.

따라서 스칼라 부임은 그런 아쉬움을 해소하고 ‘오페라 지휘자’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할 기회라 하겠다. 그의 스승이었던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떠난 지금, 바야흐로 ‘리카르도 샤이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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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에 있는 라 스칼라 극장 야경
출처 : 네이버 명지휘자 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