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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의 역사 - 2(1950년대의 팝음악 1)

2015.08.08 22:12

오작교 조회 수:5306

팝의 역사 - (2) 1950년대의 팝음악 1 
 

 

시대별로 팝 음악의 지형도를 알아보자.

여기서는 각 시기마다 어떤 음악들이 존재했고, 어떤 가수들이 그 음악흐름을 주도했는지, 그리고 어떤 아티스트들과 노래들이 빌보드 차트에서 두각을 나타냈는지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 첫 번째로 1950년대의 팝 음악에 대해서 알아보면, 1950년대부터 출발하는 특성상 그 이전시기의 음악에 대해서 먼저 언급하고 들어가야 할 것이다.

 

 

 

1950년 이전의 서양 대중 음악

 

우리가 현재 팝 음악이라 부르는 서양 대중 음악은 미국에서 처음 탄생했다. 19세기 중, 후반 흑인 분장을 한 민스트럴(Minstrel) 쇼가 노래와 춤, 독자적인 희극의 형태로 대서양을 건너 영국에 전해졌다(이후에도 계속해서 재즈와 블루스, 로큰롤이 미국에서 영국으로 전파되었다). 1910년대 이후에 그 음악은 레코드 산업, 소비자, 미디어와 결합되면서 비로소 제대로 된 모양새를 갖추었다.

 

20세기 팝 음악의 중심은 언제나 흑인 음악이었다. 백인 음악은 늘 그 흑인 음악을 토대로 성장해왔다. 흑인은 백인사회와 전혀 동떨어져 있었고 사회적 위치나 경제수준이 형편 없이 낮았지만 그들 자신의 표현방식을 발명해갔다. 그들은 블루스와 재즈, 가스펠을 노래했다. 재즈와 블루스가 십대의 로맨스 같은 세속적인 미덕을 위해 헌신했다면 가스펠은 구원적 메시지의 종교적 성격을 이어나갔다. 또한 대공황기였던 1929년부터 1940년까지는 흑인 댄스 뮤직인 스윙이 붐을 이루며 그 시대의 주류 음악이 되었다. 더 빠르고, 부드럽고, 힘있었던 빅 밴드 스윙은 춤추기 좋은 음악을 요구했던 대중들을 만족시키면서 거대한 시장을 이끌었다.

 

반면 백인 음악은 유럽의 전통을 계승했다. 미국 동남부 지방과 특히 애팔래치아 산맥을 중심으로 산간 지방에 살던 영국, 스코틀랜드 이주민의 자손들은 유럽에서 가져온 사회적, 종교적 전통 틀을 유지했다. 그들은 개척자들의 고향인 유럽을 그리워하는 내용을 음악에 담아 피들과 밴조로 연주했다. 그것이 바로 ‘백인의 블루스’라는 컨트리 음악이었다. 한편 엘리트 작곡가들이었던 조지 거쉰, 어빙 벌린, 콜 포터에 의해 클래식 전통을 기반으로 한 틴 팬 앨리(Tin Pan Alley) 음악의 전형이 마련되었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프랭크 시나트라, 페리 코모 등의 스탠더드 팝과 브릴 빌딩의 10대 팝, 그리고 우디 거스리와 피트 시거의 주도하에 정치 지향적인 포크 음악이 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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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어찌 보면 40년대 중반 이전까지 백인음악과 흑인음악이 뚜렷이 구분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민중성이라는 특징을 가졌다는 측면에서는 동일했다. 실제로 초창기 블루스나 포크 음악을 하나씩 들어보면 비음 섞인 보컬 음색이나 음악적으로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태도나 이데올로기적으로는 큰 차이가 있다. 백인 음악은 여전히 보수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던 반면, 흑인 음악은 더욱 공격적이었고 거침없는 성 표현을 담아냈다. 당시까지 컨트리 등 대부분의 백인 음악은 그러한 노골적인 성적 취향을 결코 반영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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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50년대부터는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백인들은 흑인 음악을 전면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백인 젊은이들은 블루스와 스윙, 나아가 로큰롤을 받아들였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흑인 음악이 프랭크 시나트라로 대변되는 스탠더드 팝보다 훨씬 더 활력이 넘쳐흘렀기 때문이다.

 

육체적인 관능을 마음껏 표현한다는 점도 이끌렸다. 록 비평가 사이먼 프리스에 의하면, 흑인 음악은 백인 십대들을 위한 정상적이고 개인적인 관능을 널리 알리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되었다. 영국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재즈에서 레게에 이르기까지 흑인 음악이 적어도 네 세대 동안 유행에 민감한 젊은이들의 배경 음악이 되었다.

 

A Time To Rock

 

1950년대는 ‘록의 시대’였다. 당시 모든 음악은 모두 록으로 귀결되었다. 록 음악은 스탠더드 팝 정도만이 있었던 50년대에 엄청난 사회적, 문화적 충격을 주었다. 틴 팬 앨리에서 로큰롤로의 이행하기까지의 과정. 그렇다면 이제 록에 초점을 맞추면서 당시 대중들에게 사랑 받았던 음악들은 무엇이며, 또 로큰롤은 어떻게 탄생했는지 살펴보자. 그 음악 이야기들과 더불어 사회, 정치적 상황, 즉 컨텍스트(context)도 함께 들여다보자.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인들은 교외로 대거 이주했다. 특히 남부인들은 일자리와 더 나은 삶의 질을 찾아서 도시로 몰려들었다. 대부분의 도시에는 갑자기 늘어난 교외의 백인들과 남부의 흑인들로 인해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다. 동시에 각각 컨트리와 블루스라는 자신들의 문화(이 두 음악은 로큰롤의 토대가 된다)를 지니고 있었던 백인과 흑인은 도시에 많은 청중들을 몰고 왔다.

 

처음엔 도회지 백인들의 음악이 압도적으로 우세였다. 대부분의 라디오 방송국들이 틴 팬 앨리 음악만을 계속해서 틀어주었기 때문이다. 흑인 음악가들은 백인들이 절대로 출입하지 않는, 술집들과 사교 파티장, 댄스홀에서만 연주했다. 즉 로큰롤 이전의 대중음악의 주류는 틴 팬 앨리 팝 이었다. 하지만 여기저기 조그만 레코드 가게들에서 흑인 음악과 컨트리 레코드를 함께 팔기 시작했다.

 
05.jpg 도시 풍의 백인 대중음악은 여전히 발라드 타입의 틴 팬 앨리 전통에 의존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참신한 움직임과 새로운 경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흑인 음악 근처는 가지도 않던 백인 가수들이 흑인들의 보컬 스타일, 즉 좀더 거칠고 귀에 거슬리고 격정적이고 리드미컬한 창법을 따라 하고 나섰다.

 

그 중 1951년 경 여성 팬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던 백인 가수 조니 레이(Johnny Ray)는 댄스홀에서 ‘Cry’라는 곡을 부르며 주먹으로 가슴을 치고 온몸을 구르는 등 인상적인 무대 매너를 보여주었다. 이는 그 시기의 토니 베넷, 프랭크 시나트라, 페리 코모, 냇 킹 콜 등이 주도했던 유럽 스타일의 부드러운 크루닝(crooning) 창법과는 전혀 다른 혁신적인 시도였다. 그것들은 이젠 낡은 소리였다.

 


06.jpg 또 다른 참신한 징후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었다. 블루스와 컨트리 음악이 다른 음악들과 섞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전설적인 흑인 블루스 가수 리드벨리(Leadbelly)에 의해 작곡된 1936년도 블루스 곡 ‘Goodnight Irene’이 백인 포크 그룹 위버스(Weavers)에 의해 1950년에 레코드로 녹음되었다.

 

이처럼 흑인의 블루스 곡을 백인이 가사를 각색해 취입한 음반들을 가리켜 ‘커버 레코드’라고 부르며, 이러한 커버 레코드들은 오리지널보다 훨씬 더 큰 사랑을 받았다.

 

컨트리 음악 역시 이질적일 것 같은 스탠더드 팝 가수들이 리메이크했다. ‘컨트리의 아버지’ 행크 윌리엄스의 ‘Cold, Cold Heart’는 1951년 토니 베넷에 의해 다시 불려졌다. 이러한 곡들은 여전히 현악 오케스트라나 틴 팬 앨리 특유의 19세기 풍 전통방식을 담고 있었지만 좀 더 다른 패턴으로 열려진 가능성을 보여준 예들이었다.

 

 

로큰롤의 탄생

 
07.jpg 록 음악이 언제 탄생했는지 그 정확한 날짜를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많은 사람들은 빌 헤일리 앤 더 코미츠의 ‘Rock Around The Clock’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1955년 하반기를 그 시작점으로 꼽곤 한다.

 

로큰롤이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음악이 널리 인기를 얻기 시작한 1955년은 팝 역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전환점으로 기록된다.

 

1954년 녹음되었으나 영화 [폭력교실]에 쓰이면서 비로소 로큰롤 신화가 된 ‘Rock Around The Clock’은 당시 처음엔 모든 미국 땅에 울려 퍼졌고 얼마 후에는 그 놀라운 기세가 바다 건너 유럽까지 집어 삼켰다.

 

이처럼 로큰롤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빌 헤일리는 원래 컨트리 뮤지션으로 50년대 초반부터 흑인 리듬 앤 블루스 곡들과 백인의 컨트리 웨스턴 풍의 음악들을 섞기 시작했다. 기타와 더블 베이스, 드럼으로 연주하는 그의 음악은 재즈나 블루스보다는 백인 컨트리 음악이 더 우세했고, 목소리는 약간 거슬렸지만 비트는 왠만한 흑인 음악보다 강력했다. 메시지적으로는 흑인 리듬 앤 블루스의 근간인 노골적인 성 표현과 우울함을 거세하고 낙관적이고 십대들에게 전혀 무해한 단순한 음악으로 변형시켰다. 그의 마음씨 좋아보이는 포동포동 살찐 외모와 신나는 스윙 음악은 십대 청소년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 헤일리의 ‘Rock Around The Clock’이 로큰롤의 시작이라고 확언할 수는 없다. 실은 그 몇 년 전부터 이미 그와 비슷한 음악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1953, 1954년 발표되었던 빌 헤일리 앤 더 코미츠의 ‘Crazy Man Crazy’와 ‘Dim Dim’, 더 크로우스(The Crows)의 ‘Gee’, 조 터너(Joe Turner)의 ‘Shake, Rattle, And Roll’, 더 코즈(The Chords)의 ‘Sh-Boom’ 같은 곡들이 모두 그와 유사한 스타일이었다. 유독 빌 헤일리의 음악이 폭발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학생들이 선생님을 고발하는 내용의 영화 [폭력교실]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극장 대형 화면과 대형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Rock Around The Clock’을 듣고 청소년들은 즉시 강렬한 인상을 받았고, 그들의 억누를 수 없는 욕구를 그 새로운 음악을 통해 분출했다.

 

이처럼 그 몇 년 사이 패츠 도미노(Fats Domino), 레이 찰스(Ray Charles) 등이 흑인 청중들을 위해 연주했던 음악이 갑자기 국가적인 화제로 떠올랐다. 그 중 몇몇 곡은 로큰롤이라는 용어로 사용되었으며, 그 로큰롤이라는 단어를 처음 말한 사람은 앨런 프리드(Alan Freed)라는 디제이였다. 프리드는 일찍이 백인 젊은 층이 흑인 음악을 얼마나 좋아하는가를 알아챘다. 그는 2년 동안 [Moondog’s Rock’N’Roll Party]라는 라디오 쇼를 진행하면서 백인 젊은이들에게 로큰롤을 들려주었다. 앨런 프리드는 흑인의 음악을 인종적 낙인에서부터 구원해 로큰롤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며, 궁극적으로 로큰롤의 보급자 역할을 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라디오와 레코드를 통해 흑인 음악을 들었으며, 이에 따라 메이저 레이블들도 그 음악에 관심을 기울였다. [애틀랜틱]처럼 흑인 음악에 종사하는 인디 레코드 회사들도 이 즈음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편 거꾸로 흑인이 백인 음악을 하는 가수들도 있었다. 거의 백인에 가깝게 완벽한 틴 팬 앨리 팝을 들려준 냇 킹 콜(Nat King Cole)은 당시까지의 그 어떤 흑인보다도 거대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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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프리드와 빌 헤일리, 그리고 다른 뮤지션들이 로큰롤의 위상을 한껏 끌어올렸다. 로큰롤의 이미지는 젊음과 아름다움, 반항, 낭만 그 자체였다. 그러나 이를 반항적이고 외설적인 측면으로만 본 미국 기성 세대들은 로큰롤에 대항하여 싸웠다. 십대들은 아직 완전히 부모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유행을 쫓고 돈을 낭비하고 자유분방한 삶을 즐기는 듯 보였지만 정작 본심은 부모님과 그들의 안정된 가치를 사랑했다. 로큰롤은 아직 안정된 위치에 있지 못했다. 그처럼 불안한 행보를 내딛던 로큰롤이 이후 오래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흑백을 대표했던 두 명의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와 척 베리(Chuck Berry) 때문이었다.

 

 

흑백이 하나된 로큰롤 시대


11.jpg 엘비스 프레슬리는 한마디로 ‘흑인의 목소리로 노래하는 백인’이었다.

[선] 레코드의 사장 샘 필립스는 만약 흑인 음악을 하는 잘 생긴 백인 청년이 있다면 그는 백만장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결국 그 말은 바로 엘비스를 두고 하는 얘기가 되었다. 그는 흑인 블루스맨들의 노래를 듣고 자란 시골 소년이었다. 그래서 백인이면서도 흑인의 감성을 간접적으로 습득했다.

 

엘비스는 기본적으로 리듬 앤 블루스와 컨트리를 조화시켜 빠르고 강력한 로큰롤을 구한다는 점에서 빌 헤일리와 같지만 훨씬 더 다이내믹하고 폭발적인 가창력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무대 위에서의 흥분된 에너지와 성적인 뉘앙스를 암시하는 몸짓은 그 누구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던 매력이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엉덩이 흔드는 제스처 때문에 그는 ‘펠비스(The Pelvis, 골반)’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데뷔앨범 앞면에 리듬 앤 블루스, 뒷면에 컨트리를 실어 흑백을 통합했다. 1954년 7월 엘비스가 처음 녹음한 곡도 바로 흑인 블루스 뮤지션인 아서 크루덥(Arthur Crudup)이 지은 ‘That’s All Right’이었다. 1956년에 발표한 ‘Heartbreak Hotel’은 백인들은 물론 흑인 청중들에게도 거대한 성공을 거두었다.

 

계속해서 그는 차례로 ‘Hound Dog’, ‘Jailhouse Rock’, ‘Don’t’, ‘It’s Now Or Never’ 등 엄청난 수의 넘버원 싱글들을 배출해냈다. 포마드로 빗어 넘긴 검은 머리, 하와이 풍의 셔츠, 점차 가늘어지는 바지는 진정한 50년대 로큰롤의 이미지였다.

 

 
12.jpg 10대의 우상이 된 엘비스 프레슬리처럼 눈에 띄는 파급력을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척 베리는 훨씬 창조적인 흑인 아티스트였다. 프레슬리는 남들이 쓴 곡만을 불렀지만 베리는 스스로 곡을 쓰고 기타를 연주한 훌륭한 기타리스트이자 싱어 송 라이터였다.

 

그는 모든 면에서 초기 ‘로큰롤의 형식미’를 확립했다는 평을 듣는다. 베리의 음악은 언제나 컨트리의 근원과 시카고 블루스의 뿌리에 충실했다. 기타의 원기 왕성한 리듬을 바탕으로 한 익살스러운 보컬이 특징이다.

 

척 베리 음악의 또 다른 특징은 늘 50년대 십대의 모습을 관통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연인에게 바치는 ‘Maybelline’, 자동차에 대한 찬가 ‘No Money Down’, 학교에서의 10대의 고뇌를 노래한 ‘School Days’, 팬들에 대한 곡인 ‘Sweet Little Sixteen’, 그 자신에 대한 노래 ‘Johnny B. Goode’, 음악을 위한 송가 ‘Roll Over Beethoven’, 미국에 대해 노래한 ‘Back In The USA’ 등이 바로 그것이다.

 

연인, 자동차, 학교, 음악, 자신, 그리고 미국…. 이는 팝 뿐 아니라 50년대 미국사를 요약하고 있는 중요한 대목이다. 한편, 척 베리는 뛰어난 기타 연주로 비틀즈 멤버들, 그 중에서도 존 레논, 그리고 롤링 스톤즈 멤버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기도 하다.

 

 
13.jpg 1955년 이후 5년 동안은 명백히 로큰롤의 전성기였다. 리틀 리처드, 보 디들리, 척 베리, 패츠 도미노 등 최고의 흑인 가수들이 계속해서 그들의 흑인 리듬 앤 블루스 스타일을 연주해나갔다.

 

폴 매카트니의 영웅이었던 리틀 리처드(Little Richard)는 가장 대담한 뮤지션 중 한 명이었다. 화려한 치장을 한 채 전보다 두 배나 빠른 점프 블루스(경쾌하고 리드미컬한 블루스) 음계를 노래했으며 샤우팅 창법으로 끊임없이 에너지를 발산했다.

 

보 디들리(Bo Diddley)는 원시 아프리카 음악에서 가져온 리듬을 선보였으며, 디스토션을 사용하면서 일렉트릭 기타를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패츠 도미노는 자유로운 즉흥연주와 힘찬 박수가 특징인 피아노 연주를 통해 로큰롤 사운드를 정착시키는 데 중요한 도움을 주었다.

 

엘비스 프레슬리, 제리 리 루이스, 버디 홀리, 에벌리 브라더스, 빌 헤일리 등 백인 로큰롤 스타들도 모두 그들의 원류 컨트리 음악과 리듬 앤 블루스를 섞은 하이브리드 사운드를 정착시켰다.

 

[선] 레코드 소속의 제리 리 루이스는 ‘Great Balls Of Fire’, ‘Whole Lotta Shankin’ Going On’ 등의 히트 곡을 통해 광란의 홍키통크 피아노 연주를 들려주며 성욕과 격렬함을 이끌어냈다. 텍사스 남부 출신의 버디 홀리는 그의 보컬 그룹 크리켓츠(Crickets)와 함께 ‘Peggy Sue’, ‘That’ll Be The Day’, ‘Rip It Up’ 등의 멜로딕하면서도 서로 다른 독특한 분위기를 내는 신선한 곡들을 배출했다. 형제 듀오 에벌리 브라더스(Everly Brothers)는 힘찬 사운드에 달콤한 하모니를 녹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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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 라디오 3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