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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집 가야금 산조 / 함동정월

2022.07.19 17:01

오작교 조회 수:783

02. 함동정월 - 가야금산조.jpg

 

   함동정월은 최옥산의 가야금 산조를 이어받아 연주한다. 최옥산은 가야금 산조와 시조로 알려진 김창조에게서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옥산의 성숙기, 활동기는 김창조가 이미 작고한 뒤가 되므로 전적으로 김창조의 영향을 받지는 않은 것으로 짐작된다.

 

   최옥산이 전한 가야금 바디는 현존하는 여러 가야금 산조 가운데서 가장 짜임새가 좋고 높은 예술성을 지닌 것으로 정품이 나 있다. 가야금 산조가 김창조 시대의 모습과 똑같은 것이라면 최옥산은 김창조의 음악을 왜곡시키지 않고 계승한 사람일 것이고, 그렇지 않고 김창조 시대의 산조를 바탕으로 해서 최옥산이 스스로 가락을 짜 넣은 것이라면, 최옥산은 잦곡가로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함동정월이 연주한 최옥산류 가야금 산조는 다스름과 진양조, 중머리, 중중머리, 늦은 자진머리, 자진머리. 휘머리 등 여섯 장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02. 함동정월 .jpg

함동정월(咸洞庭月, 1917~1994)

 

   본관은 강릉(江陵). 본명은 함금덕(咸金德)이고 함동정월은 예명이다. 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 지로리에서 아버지 함일권과 어머니 박양근 사이의 2남 5녀 중 넷째 딸로 태어났다.

 

   어릴 때 집안이 기울어져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되자 11세 때 광주권번에 들어가 예기(藝妓) 수업을 받았다.

 

   그곳에서 시조·승무·검무와 가야금으로 영산회상을 배우고, 12세 때부터 고향인 병영으로 돌아와 김복술에게 가곡을, 김채만의 제자인 김군옥에게 판소리 중 적벽가와 흥보가를, 공장식의 제자인 임공교에게 춘향가를, 최옥산(崔玉山)을 만나 가야금 산조를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17세 때 정식으로 목포 권번에 이름을 올리고 예기의 삶을 시작하였다. 이때 목우암이라는 절에 가서 100일 공부를 하며 김창환의 제자인 오수암(吳壽岩)한테서 판소리 심청가와 춘향가를 배웠다.

 

   19세 되던 해에 일본 칼럼비아레코드사가 광주에서 개최한 경연대회에 판소리로 입상한 뒤 일본 동경에 가서 판소리, 육자배기, 가야금 산조, 가야금 병창의 음반을 취입하였다.

 

   21세에 서울에 올라와 조선권번에 이름을 올리고 예기로 활동하다 두 달 반 만에 혼인하여 17년간 음악생활을 중단하였다. 38세 때 대전에서 사설 국악원을 설립하여 가야금을 다시 시작하였다. 41세 때 다시 서울로 올라와 박초월(朴初月)이 운영하던 예술학원에서 판소리 공부를 하다가 46세부터는 정악원(正樂院)에서 11년간 영제 시조를 공부했다.

 

   53세부터 57세까지 명고수 김명환(金命煥)과 혼인하여 함께 최옥산류 가야금산조 연주의 절정기를 이루었다. 64세 때인 1980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받았다.

 

   78세에는 뿌리깊은나무 산조전집(9 LP 중 2번 음반, 함동정월 가야금 산조, 북:김명환, 1989, 1994년에 킹레코드사에서 CD로 복각됨), 함동정월 가야금산조 병창 판소리 남도민요(컬럼비아 유성기 원반9, 1935년 녹음, LG미디어, 1996)를 녹음하였다.

 

   여러 분야의 국악 공부를 열심히 했으므로 산조·판소리·가곡·시조 등 다양하게 음악의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비슷한 시기의 다른 연주자들에 비하여 스승에게 배운 가락이 완벽하여 더 첨가할 것이 없다며 그대로 연주하였다. 그래서 최옥산 가야금산조가 산조의 원형(原形)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꼽히고 있다.

 

   험난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건강도 고르지 못하였으나 예술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꾸준히 간직하였으며 끊이지 않고 후진에게 전수시키는 일에도 열심이었다.그의 제자로는 윤미용(尹未容), 나현숙(羅賢淑), 성애순(成愛順), 황병주(黃炳周), 이경자(李京子), 이명희(李明姬), 김상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