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ahualpa Yupanqui - 중남미 음유시인, 누에바 깐씨온의 아버지
2015.12.17 16:20
유빵끼(Atahualpa Yupanqui, 1908∼1992)는 메스티소로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되찾고 유럽의 강권적 문화유산의 틀을 깨고자 인디오의 길(Camino Del Indio)을 선택하였다. 자신의 이름 또한 본명인 엑또르 로베르또 차베로(Hector Roberto Chavero) 대신 스페인 정복자들의 침략에 맞서 싸운 옛 잉카제국의 역대 왕의 이름에서 차용했다.
아르헨티나의 농촌을 여행하면서 그곳에 남아 있던 음악적 전통을 찾아 헤맸던 이력으로 인해 그는 칠레의 비올레따 빠라(Violetta Parra)와 더불어 누에바 깐씨온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누에바 깐씨온에 꾸바의 누에바 뜨로바를 포함시킬 수 있다면 그는 까를로스 뿌에블라(Carlos Puebla)와 더불어 20세기 전반기 라틴 아메리카 최고의 뜨루바도레(trouvadore)일 것이다.
민속 '가수'들의 음악 뿐만 아니라 빠야도레스(payadores)라고 불리는 즉흥시인의 구비문학도 채집하다가 뒤에는 창작을 하게 된다는 점에서는 우디 거쓰리(Woody Guthrie)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Basta Ya!" 등에서 '양키'를 비판한 이유로 그는 1932년과 1949년 망명길에 오르게 되고 그때마다 빠리를 택한다. 빠리에서 에디뜨 삐아프(Edith Piaff), 비올레따 빠라 등과 교류했고, 1949년에는 유럽에서 처음으로 순회공연(tour)을 가지기도 한다. 1967년 또 한차례의 망명 이후 1992년 그곳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빠리에 머물렀다.
그는 아르헨티나의 인디오 출신으로 민속 유산의 회복운동을 통해 전통과의 접목을 시도했다. 유팡키는 라틴아메리카 음유시의 전통 중 하나로 내려오던, 아르헨티나 팜파(대평원)의 가우초(카우보이)의 노래인 파야다Payada를 현대화시켜 노래불렀다.
화려한 기타 연주기술을 바탕으로 가우초 목동들의 고유한 서정성을 고급문화 수준까지 끌어올림으로써 중남미 음유시인의 아버지라 불리는 유팡키는 잉카제국의 왕이었던 아카우알파의 이름을 자신의 예명으로 삼았다.
1908년 아르헨티나 투쿠만 지방에서 태어난 그는 1934년 첫 앨범을 발표했다. 1950년대 노래운동 때문에 조국에서 추방되어 유럽으로 건너간 그는 프랑스의 시인 폴 엘뤼아르의 소개로 알게된 에디트 피아프와 네 차례 함께 공연하기도 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음유시인 조르주 브라상도 그의 음악동지이다. 그는 프랑스 전역을 돌면서 음악활동을 벌였는데, 프랑스 초등학교 음악교과서에 그의 곡이 수록되어 있을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다섯 살 때부터 집안에 있던 아버지의 기타를 만졌다. 일곱 살 때 마을의 신부에게서 바이올린을 삼 년 간 배운 뒤, 당대의 유명한 기타리스트였던 알미론Almiron 선생에게서 기타를 배운다. 이때 그라나도스, 알베니스, 바하의 곡들을 연주하면서 기타와 음악이라는 광대한 우주와 만나게 된다. 곧 베토벤의 '월광'과 비제의 곡들을 연주하면서 '무한한 고독의 샘'인 기타에 빠져든다.
그는 뛰어난 기타연주 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언제나 '난 기타가 스스로 노래하는 것을 도와주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늘 노래에 말을 걸었고, 노래는 그에게 많은 이야길 들려주었다. 그는 말한다. "내가 열한 살 때, 나보다 나이가 훨씬 위인 한 학생이 '네 번째 줄은 테너이고, 다섯 번째는 바리톤, 여섯 번째는 베이스야' 하고 말했습니다. 그때 내가 생각하길, '그 줄이 테너와 베이스라면 왜 노래하지 않지? 왜 스스로 소리내지 않지? 그렇다면 내가 쳐주어서 테너과 바리톤이 서로 화답하게 도와줘야지.' 난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이전에 삼 년 동안 바이올린을 배웠던 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기타는 유팡키 손가락의 산책로였다. 특히 조국의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파리에서 생활하던 유팡키의 마음은 기타의 나무결과 눈이 마주칠 때면 멀리 고향의 나무로 달리곤 했다. 그럴 때면 그는 긴긴 밤을 기타줄 사이로 서성였다.
난 밤에게 물었지
언제 기타가 잠드는지
난 기타가 기도하는 걸 알아
새벽에는 찬송하고
아침에는 밀롱가를 부르고
오후에는 목동의 노래를,
탱고를 부를 땐 삶을 불사르면서
사랑과, 고통과, 분노에 휩싸여...
아아! 밤아, 말해주렴
언제 기타가 잠드는지!
유팡키는 스스로를 '전통을 배우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항상 자기 노래의 고향인 아르헨티나의 초원을 마음 속에 둔다.
"고향에 갈 때는 발 밑을 조심하게나.
자칫 길가에서 벗어나면 조상의 뼈를 밟거든."
그가 전통을 배우는 방법은 자연이나 목동들이 지나가면서 하는 말을 귀담아 듣는 것이다. 민요가락이나 속담을 말하는 사람은 자연이 말하는 것을 들을 줄 알기 때문이다.
"초원에서 목동으로 일하는 내 친구에게 이런 일이 있었어요. 언젠가 우리가 친구들이랑 나무 밑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그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거예요. 방금 울던 그 새가 어디 있나 찾은 것이지요. 그리곤 하는 말이, '야! 날개가 있는 놈이 그리 불평을 하면, 땅에 붙어사는 난 어쩌란 말이냐?' 하는 거예요. 난 그 소리를 듣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종이와 펜을 달라고 했지요. 난 이런 걸 찾아 돌아다니는 사람입니다."
들판에 풀잎이 가득 돋는 것처럼
땅엔 온갖 노래로 가득 차 있다.
귀를 종긋하고 들어봐
지금도 들려주고 있잖니...
유팡키는 이어 이렇게 말한다. 내 친구는 들을 줄을 알았던 거예요. 언젠가 내가 집에서 이 얘길 했더니 누군가 내게 '잊어버린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난 이 말을 결코 잊지 않아요. 또한 사람들이 모두 이것을 잊지 않기 바래요. 그래서 난 노랠 부르지요. 사람들이 씨알들의 고통과 즐거움, 절망과 희망이 담겨있는 그 대지의 산물인 노래를 잊지 않길 바라는 거죠. 좋으면 좋은 대로, 싫으면 싫은 대로 우리 모두가 더욱 정을 나눌 수 있도록 말이에요. 좀더 눈을 크게 뜨고 상대방의 눈을 쳐다보면 우리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것이 그 눈에 비치지요."
어둠이 창 밖의 경치를
앗아갈 때
내면으로 향한 창을
살며시 연다
바로 그때, 바로 그때
놀란 비둘기처럼
후다닥
시가 날아오른다.
유팡키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기타를 옆에 끼고 이방인으로 파리에 살고있는 고독한 아르헨티나 인디오의 영상이 떠오른다. 유럽에 망명한 수많은 라틴아메리카 지식인들의 모습이 오버랩 되면서...
기타소리는 타령뿐
목소리는 허공으로 흩어지네
담배연기 한 줄기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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