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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ossover

2018.12.05 18:49

오작교 조회 수:1870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크로스오버>

 

크로스오버(Crossover) 음악이란 말이 세차게 등장하고 있다. 신문과 방송은 마치 크로스오버가 세기말의 코드인양 상당한 관심 속에 특집방송을 내보내고 큰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한 주간의 공연 일정표를 보면 곳곳에서 다채롭게 크로스오버 현상이 펼쳐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랩과 국악이 만나고 팝과 클래식이 만나며 재즈와 국악이 만나는 공연들이 잇따라 열리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너무도 흔하게 기획되어 별 새로운 느낌을 주지도 못할 정도다. 언론은 크로스오버의 기세를 시대 분위기와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지에 특히 관심을 보인다.


분명 상호 이질적인 요소의 어울림이라고 할 크로스오버는 점점 갈수록 열려 가는 세상 이를테면 글로벌 시대와 관련을 맺는다. 어떤 음악이 세계로 나가는데 있어서 고유한 성질을 강조하는 것보다도 타(他)음악과 섞이는 ''융합''이 효과적인 경우가 많다. 지금은 특수성과 고유의 전통이 때로 생경함이나 배타적 폐쇄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 대중음악이 근래 들어 해외로 진출하려는 기운이 싹트고 있는 터라서 더욱 크로스오버라는 표현을 자주 들먹거리는 듯 하다. 지금까지 갇혀 있으면서 우물안 개구리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국내 대중음악이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선 다른 세상의 소리와 결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크로스오버가 아니면 해외시장 진출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크로스오버는 크게 보아 상호 다른 계급, 인종, 그리고 장르가 서로 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크로스오버는 세기말에 들어서 새로이 부상한 현상이 아니라 20세기 들어서 구체화된 대중음악의 오랜 근간임을 잊어선 안 된다.


가령 50년대 중반 잉태한 로큰롤부터가 흑인 블루스와 백인 컨트리 음악이 합쳐져 형성된 일종의 크로스오버 음악이었다. 흑백이라는 인종적 요소가 제거되었기 때문에 로큰롤은 전세계 젊은 대중들에게 급속히 확산될 수 있었다. 만약 로큰롤이 어느 한 인종의 음악에 머물렀다면 그토록 빠르게 ''세계화''를 기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더 많은 음악들이 대중음악이 되기 위해선 이미 대중성이 확립된 것과 만나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포크는 로큰롤과의 합성으로 포크록이 되어 60년대를 수놓았고 재즈 역시 로큰롤과 만나 재즈록을 낳았다. 포크록은 포크의 수요자나 록 팬 모두를 아울렀고 재즈마니아들도 로큰롤 팬들과 마찬가지로 재즈록을 들었다.


크로스오버가 가져온 성과들이었다. 크로스오버 시도나 실험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포크와 로큰롤 또는 재즈와 로큰롤 수요자들은 아마 서로 흩어져 있었을 것이다.


크로스오버와 퓨전이라는 것을 구분하는 사람들이 있다. 퓨전이라는 것은 '아티스트'의 실험과 시도라는 창안(創案)적 음악세계 간의 융합인데 반해 크로스오버는 '자본'에 의해 다분히 서로 다른 수요자들을 합쳐 성과를 증폭시키려는 상업적 기도의 방법론이라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재즈록은 퓨전이라고 하지 크로스오버라고 하지 않는다. 퓨전 재즈란 말은 정착되었지만 크로스오버 재즈란 말은 생소하다. 또 반대로 마이클 잭슨의 백인화된 소울은 크로스오버라고는 해도 퓨전이란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이렇게 일각에서 '예술적 교차'를 퓨전, 상업적 혼합을 크로스오버로 따로 분류하지만 사실 둘간에 큰 차이는 없다.


그러나 다소 무의미한 이런 두 음악사이의 구분 잣대는 한 번 되새길 필요가 있다. 현재 난무하는 크로스오버 현상이 갖는 문제점을 일러주는 대목이 있기 때문이다. 퓨전과 크로스오버가 지니는 가치는 시너지효과에 있을 것이다. 모르던 스타일의 음악이 자기에게 익숙한 음악으로 포장되었을 경우 그 느낌은 독특하고 새롭고 독특하게 다가올 수 있다. 그래서 절묘한 크로스오버는 독창적인 신종 장르의 출현을 초래하는 순기능이 있다.


이것은 크로스오버의 과정이 결과적으로 자연스러워야겠지만 과정도 지극히 자연스러워야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음을 가리킨다. 자연스러움이란 '새로운 시도'로서 두 음악이 서로 합쳐지는 것이다. 이럴 경우 주체는 아티스트에 있다.


그들의 창조를 향한 노력이 가져온 결과로서 크로스오버여야지 의도적으로 수요자 확대를 위해 음반자본이 꾸민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음반자본이 크로스오버에 노리는 것은 바로 시너지 효과이다. 이 말은 곧 근래의 크로스오버의 주체는 음반자본에 있음을 뜻한다.


최근 들어 샘플링의 방식으로 힙합에 클래식을 끌어들이는 크로스오버 가요가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모차르트 교향곡 27번과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가 강렬한 하드코어와 힙합 음악과 크로스오버되어 주요 소비층인 10대들도 그렇고 교단에서도 반응이 좋은 편이다. 교실에는 여전히 클래식이 살아 있다.


한 음악교사는 이렇게 말한다. "학생들에게 압도적인 인기를 누리는 스타들이 클래식을 부분적 소재로 해서 노래부르니까 우리도 할 얘기가 있고 학생들도 좋아한다. 아주 신선한 기획으로 생각되었고 한편으로 고맙기도 했다."


행여 이점을 겨냥해 힙합 음악에 고전음악을 크로스오버한 작품을 만들어낸 것 아닐까. 노래의 완성도를 떠나 제작과정이 작곡자든 가수든 자연스런 아티스트의 사고가 아니라 레코드사나 제작자에 의해 주도된 것이라면 바람직하지 않다. 그것은 '기획상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매출신장이나 이미지제고를 위한 방편으로 만들어진 음악을 듣는다면 불행한 것 아닐까.


요즘 모든 음악이 그렇다. 상기한 대로 음악의 중심이 아티스트에서 음반자본으로 거의 넘어가 있다. 가장 까다롭다는 크로스오버마저 이제는 아티스트의 것이 아니라 레코드사나 음반기획자의 소유물로 전락한 느낌이다. 자본은 전파를 수단으로 한 세뇌작업을 가하면 '소비자의 만성'을 창출할 수가 있다. 실은 부자연스러운 것이 많은 방송횟수에 의해 길들여지고 있다는 말이다.


현재의 크로스오버는 아주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억지스러운 시도나 작품들이 수두룩하다. 이게 압도적 전파세례에 의해 가려있고 그것을 중간에서 견제하는 평론도 없고 그런 활동의 장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최악의 상황이다. 그러나 '합치는 타협'의 미학만큼 '버티는 고집'의 미학도 동시에 존중되어야 한다고 본다. 어쩌면 음악은 보다 순수한 것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만약 크로스오버의 도도한 물결에 의해 순수한 것이 매몰되어 가는 게 지금의 추세라면 지금의 음악현실은 이성을 상실한 왜곡상황이 아닐 수 없다. 크로스오버란 먼저 '순수와 순수가 만나 또 다른 순수를 교배하는 과정'임을 잊어선 안 된다.

그런데 왠지 천박한 결과로 인해 두 음악이 다 순수함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화학적 융합'이 아닌 '물리적 조합'이 대부분인 탓이다. 무조건 합쳐졌다고 크로스오버가 될 수 없다. 왜 무조건 합치는 일이 일어날까? 바로 자본이 개입해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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